식물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사무실이 작은 화원 같다. 작은 사무실에 크고 작은 화분으로 가득하다. 책상을 중심으로 사방에 식물이 있어서 숲속에 있는 것 같다. 한 해, 두 해 모으다 보니 이십여개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가지치기를 해서 두 개가 더 추가되었다.
행운목 가지치기를 하고
사무실 역사와 함께 하는 식물이 있다. 행운목을 말한다. 2007년 11월 사무실에 입주할 때 공간이 허전하여 꽃집에서 행운목을 하나 사왔다. 그때 당시 5만원이 넘었는데 목대가 장딴지처럼 두꺼운 것을 샀다.
행운목은 물만 주어도 잘 자란다. 일주일에 한번씩 물을 주었다. 다행히도 난방이 되는 사무실이어서 겨울에 얼어 죽을 염려는 없었다.
행운목은 해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사온지 만 3년이 되었을 때 꽃을 피웠다. 행운목꽃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에 대한 소감을 블로그에 올려 놓았다.
행운목꽃은 매년 피다시피 했다. 어느 해에는 두 번 피기도 했다. 한해를 걸러서 피기도 했다. 몇 년 간 피지 않다가 올해 피었다. 마치 멀리 떠난 자식이 돌아 온 것처럼 반가웠다.
행운목을 십년 이상 키우다 보니 천정을 치기 시작했다. 꼭대기가 천정에 닿아 구부러지기 시작할 때 조치를 취해야 했다. 가지를 자르기로 한 것이다.
두 달간 인큐베이팅을 했는데
행운목은 두 개의 가지가 경쟁하듯이 자랐다. 처음에는 엇비슷했지만 나중에는 차이가 벌어 졌다. 두 개의 가지가 천정에 닿자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럴 경우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한 것이다. 중간을 잘라서 또 다른 행운목을 만드는 것이다.
행운목을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자 했다. 톱으로 자른 것을 살리기로 한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뿌리가 날 때까지 물에 담가 놓는 것이 좋다고 했다. 당장 실행에 옮겼다.
과실주를 담그는 커다란 유리병을 다이소에서 구입했다. 두 개의 가지를 각각 담아 놓으니 마치 화병처럼 보였다. 인터넷에서 경험자에 따르면 두 달 지났을 때 뿌리가 날 것이라고 했다. 그때가 6월 1일이다. 블로그에는 ‘행운목 가지치기를 했는데’(2020-06-0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려 놓았다. 만 두 달 보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놀랍게도 뿌리가 수북히 내렸다.
화병의 행운목에서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거의 두 달 가까이 되었을 때 한쪽 병에서 뿌리가 생겨난 것이다. 날자가 갈수록 뿌리는 많아지고 잔뿌리까지 생겨났다. 또다른 화병에서는 약 보름 늦게 뿌리가 생겨났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두 개의 화분에 옮겨 심고
두 화병에 뿌리가 내렸을 때 옮겨 심을 때가 되었다. 화분을 구해야 했다. 사무실 부근 화원에서 도자기로 된 화분을 두 개 구입했다. 한 개에 1만2천원하는 것이다. 이럴 때 도와 주는 것이다.
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지역 사람들이 팔아 주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역에 있는 수많은 식당은 한번쯤 가 보아야 한다. 한번쯤 먹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많이 있건 없건 먹어 주는 것이 도와 주는 것이다.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이다. 그러나 모텔과 같은 숙박업소는 예외이다.
두 개의 화분을 만들었다. 이제 행운목은 더 이상 물에서 살지 않고 흙에서 살게 된 것이다. 마치 행운목이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화병은 일종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 것이다. 마치 엄마 뱃속에 있다가 나온 것 같은 것이다. 행운목의 새로운 탄생이다.
두 개의 화분이 완성되자 행운목이 이제 세 개가 되었다. 모태가 되는 어머니 행운목은 가지가 잘린 채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달이 지나니 잘린 꼭대기에서 싹이 나는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삐죽이 내미는 것에 속도가 붙은 것 같다. 또 다른 새로운 탄생이다.
식물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사무실 식물키우기 13년째이다. 식물키우기가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도중에 죽은 것도 꽤 된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블로그에 사진으로는 남아 있다. 마치 죽은 자를 사진속에서 보는 것과 같다.
살아 남은 식물은 잘 자라고 있다. 물만 주어도 잘 자라는 것이 놀랍다. 식물이 어떻게 물만 먹고 자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다. 물만 주도 잎이 나고 줄기가 성장해서 쭉쭉 뻗어 나갈 때 이를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는 것이 기적인지 모른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인간이건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기적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했을 것이다.
숫따니빠따에 자애경이 있다. 경을 보면 “살아 있는 생명이건 어떤 것이나, 동물이거나 식물이거나 남김없이”(Stn.146) 라는 구절이 있다. 동물은 물론 식물에 이르기까지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했다.
경에서 ‘동물이거나 식물이거나’라는 말은 “tasā vā thāvarā vā”를 번역한 말이다. 빠알리어 ‘tasā’는 ‘movable’의 뜻으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빠알리어 thāvara는 ‘immovable’의 뜻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뜻한다.
주석에 따르면 붓다고사는 “tasā vā thāvarā vā”에 대하여 “갈애가 있는 것이든 갈애가 없은 것이든”이라고 해석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움직이는 것은 동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식물로 번역했다. 그래서 “동물이거나 식물이거나”라고 한 것이다.
식물도 해쳐서는 안된다
부처님은 살생을 하지 말라고 했다. 살생의 범주는 인간만이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동물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확대 되어서 식물도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계행의 청정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디가니까야를 보면 수행승의 계행에 대하여 세 가지로 언급해 놓은 것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 중에 짧은 크기의 계행을 보면 “그는 또한 식물을 해치는 것을 여읩니다.”(D2.41)라는 구절이 있다. 수행자는 식물이라고 해서 함부로 자르거나 해서 해치지 말라는 것이다.
식물은 동물과 다르다. 동물은 죽으면 다시는 부활되지 않는다. 그러나 식물은 잘라도 싹이 다시 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무 가지를 잘랐다고 해서 살생죄는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과일을 따 먹었다고 해도 죄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것도 금했다. 부처님은 중간크기의 계행에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런 내용이다.
“혹은 어떤 존귀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신자들이 보시한 음식을 향유하면서 이와 같이 예를 들어, 뿌리를 종자로 하는 것, 줄기를 종자로 하는 것, 열매를 종자로 하는 것, 씨를 종자로 하는 것, 씨앗을 종자로 하는 것과 같은 종자와 식물을 해칩니다. 그러나 그는 종자와 식물을 해치는 것을 여읩니다. 이것도 또한 그 수행승의 계행입니다.”(D2.43)
부처님은 식물을 해치지 말라고 했다. 인간은 물론 동물도 해치지 말고, 심지어 식물도 해치지 말라고 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유일한 것으로 보여진다. 식물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식물은 생명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고픈 장로 이야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라면 수행승은 농사를 지어서는 안된다. 뿌리, 줄기, 열매, 씨로 된 것을 수확하여 생계를 유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이라면 은둔자의 삶을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홀로 은둔하며 산다는 것은 자급자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탁발에 의존하지 않고 자급자족했을 때에는 식물을 해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수행승은 나뭇잎은 물로 풀한포기를 함부로 해쳐서는 안된다. 당연히 주지 않는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 나무에 달린 열매를 취해서도 안된다. 심지어 떨어진 열매를 먹어서도 안된다. 청정도론에서 망고를 먹었던 장로 이야기가 있다. 한국빠일라성전협회본 각주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는 기근이 들었을 때 여행을 했다. 음식을 먹지 못해 피곤하고 허약해졌다. 그는 열매로 뒤덮인 망고나무 아래에 누웠다. 여기저기 많은 망고가 떨어졌다. 주인 없는 망고가 근처의 바닥에 떨어졌으나, 그것들을 집어서 줄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에 먹지 못했다. 그때 그보다 나이가 많은 한 재가신도가 그가 지친 것을 알고 그에게 망고즙을 마시도록 주었다. 그는 그를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갔다. 그때 그 장로는 그에게 설법을 했다. 그리고 그의 등위에 있을 때 앎과 봄을 통해서 길을 따라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빠라맛타만주싸, 306번 각주)
장로는 배가 고파도 땅에 떨어진 망고를 집어먹을 수 없었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면 도둑질이 되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재가자가 집어 주었을 때 비로소 먹을 수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훔치려는 의도만 있어도 악작죄
장로가 떨어진 망고열매를 먹지 않은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율장 비구계에 따르면 승단추방죄에 관련하여 투도죄가 있다. 여러 가지 경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보면 승원에 있는 꽃과 열매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해 놓았다.
“승원에 있는 물건을 ‘내가 훔치겠다.’는 훔칠 마음을 갖는다던가 또는 대리자를 구하거나 또는 그것을 향해 간다면 악작죄를 범하는 것이다. 만져도, 악작죄를 범하는 것이다. 흔들면, 추악죄를 범하는 것이다. 장소에서 옮기면, 승단추방죄를 범하는 것이다.”(Vin.III.49)
사원에 있는 꽃이나 열매를 훔치려는 의도만 있어도 악작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꽃이나 열매를 만지기만 해도 추악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꽃이 아름답다고 하여 꺽거나 열매가 먹고 싶어서 따는 행위는 사실상 도둑질과 같은 것이서 승단추방죄에 해당된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굶주린 장로가 바로 옆에 망고열매가 떨어져 있어도 먹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지수화풍 사대로 자라는 식물을 보면
사무실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다. 마치 두 명의 자식이 생긴 것 같다. 인큐베이터에서 두 달 보름을 보내고 난 다음 흙이 있는 화분에 심었을 때 새로운 탄생으로 보는 것이다.
물만 주어도 쑥쑥 잘 자라는 행운목을 보면 생명의 신비를 느낀다.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고 단지 물만 주었을 뿐임에도 뿌리를 내리고 잎이 나오고 더구나 꽃이 필 때 생명을 본다. 식물이 생명인 것은 향내에 있다. 진한 행운목꽃이 향기를 발산할 때 확실히 생명이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식물은 물만 주어서 자라는 것이 아니다. 흙과 바람과 온도도 중요한 요소이다. 식물은 지수화풍 사대로 자라는 것이다. 이는 무언가를 먹어야 만 자라는 동물과는 다르다.
먹어야 생명이 유지되는 것들은 유정물이다. 정신작용이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물만 있어도 자라는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다. 정신작용이 거의 없어서 무정물에 가깝다. 그러나 향내를 발산할 때는 마치 유정물처럼 보인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늘 식물과 함께 하고 있다. 밖에 나가면 식물천지이지만 밀폐된 작은 공간에서 식물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식물은 공기를 정화하는 작용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서적 요인이 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식물이 반겨 주는 것 같다. 식물은 홀로 일하는 자에게 있어서 삶의 동반자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애착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자애의 마음으로 대할 뿐이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어느 생물에게도 폭력을 쓰지 않고, 또 죽이거나 죽이도록 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릅니다.” (stn629)
“성적교섭에서 떠나 온갖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 있는 것에 대해 적대하지 말고, 애착하지도 말라.” (stn704)
“도둑질 하지 말고, 거짓말 하지 말고,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든 생물에게 자애를 베풀어야 하리라.” (stn967)
2020-08-1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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