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새가 다하면
컴퓨터 스피커를 교체했다. 13년 쓴 것 같다. 사무실 입주와 함께 한 것이다. 그때 당시 서브우퍼 스피커가 달린 최신식 이였다. 쇳소리 나는 기존제품의 음질과는 달리 중저음이 강조되어서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 용도가 다 되었다.
볼륨조정 기능에 이상이 생겨서 불편했다. 이른바 접촉불량이다. 그래서 바꾸기로 했다. 너무 오래 사용했다는 것도 이유가 된다. 그 정도 썼으면 이제 바꿀 때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번 이런 생각이 들자 즉시 실행에 옮겼다.
대형마트 가전매장에서 스피커를 골랐다. 스피커가 두 개 있는 전형적인 타입의 것을 떠올리며 둘러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형을 깨는 제품이 있었다. 길쭉한 막대모양의 것이다. 스피커가 두 개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막대형을 보자 파격적으로 보였다.
막대형은 올인원(All ln one)이다. 스피커 두개와 앰프가 있는 서브우퍼, 그리고 전원어댑터가 한몸체에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전원은 유에스비(USB) 코넥터로 공급된다. 별도의 전원어댑터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더구나 몸체에 유에스비 단자가 있어서 컴퓨터 본체와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가격은 놀랍게도 17,000원 대이다. 한마디로 시대의 흐름을 잘 탄 대박상품이다.
막대형은 기존의 분리형을 대체했다. 용도가 다한 분리형은 버려졌다. 특별한 감정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십여년 동안 사용했기 때문에 눈에 익숙해서 정이 들긴 했지만 용도가 다한 것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보관할 만한 가치를 갖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미련없이 버렸다.
치간칫솔을 사용하고 있다. 칫솔로 이빨을 닦고 난 후에 치간칫솔로 마무리했다. 최근 이빨닦기 습관이다. 더 이상 이빨로 인해 고통받지 않기 위한 나름대로의 자구책이다. 그런데 치간칫솔질을 하는 도중에 칫솔이 부러졌다. 이런 경우 용도가 다한 것이다. 아무런 감정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용도가 다하면 용도폐기 된다. 가지고 있어 보았자 짐만 된다. 용도가 다한 것은 쓰레기와도 같다. 쓰레기는 버려야 한다. 새것이 그 자리를 메꾼다. 새것이 헌것을 밀어내고, 헌것은 새것에 밀려난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치매로 돌아가신 친척이 있다. 치매 걸리기 전에 보고 이후에 보지 못했다. 거의 십년 가까이 치매를 앓았는데 결국 요양원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장례식장에서는 크게 슬퍼하거나 애도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젊은 사람이 죽으면 슬퍼하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늙은 노인의 죽음은 무덤덤한 것이 특징이다.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용도가 다 된 것이다. 더 이상 사회적 역할을 못했을 때 용도가 다한 물건과 같은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라서 타인에게 의존하는 삶을 산다면 잊혀 지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노인이 된다는 것은 절망이다. 그래서 십이연기 정형구를 보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라고 했다.
삶의 종착지는 죽음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죽은 자는 없다.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본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통과 괴로움을 맛볼 수 있다. 나이가 들어 병이 들면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괴로움을 겪게 되는데 슬픔, 비탄, 근심을 동반한다. 결국 죽음에 가까이 왔을 때는 돌이킬 수 없는 절망에 이르게 된다.
삶의 종착지는 죽음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절망에 가깝다고 본다. 태어난 모든 존재는 절망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의 삶은 결국 절망이라는 종착지를 향해서 떠나는 '절망의 열차'를 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망의 열차는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라는 긴 복합어로 표현된다. 이 말은 1)슬픔(soka), 2)비탄(parideva), 3)고통(dukkha), 4)근심(domanassa), 5)절망(upāyāsā)이라는 다섯 개의 단어가 결합된 복합어이다. 세상에 태어난 자들은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태어남은 절망이 된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망가져서 쓰임새가 다하면 버려진다. 이렇게 본다면 13년 전에 산 스피커는 구입할 당시에 이미 버려질 운명에 있었던 것이다.
용도가 다한 물건을 버릴 때 별다른 감정이 없다. 고장난 컴퓨터를 버릴 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작동되는 것은 버리지 않는다. 오래된 카메라 같은 것이다. 필름을 넣어 사용하는 기계식과 전자식 카메라는 보관하고 있다. 핸드폰도 버리지 않고 있다. 고장난 것이 아니라 시대가 바뀌어 쓰임새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 골동품이 그렇다.
새것을 버린다면 아깝지만 쓸 만큼 썼기 때문에 아깝지 않다. 사람도 살만큼 살았으면 여한이 없을 것이다. 살아 있을 동안, 정신이 온전할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어차피 절망에 이르는 삶이라면 이제는 절망을 극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4)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5)
2020-09-2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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