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서 접한 식민지 문화유산
초등학교 시절 때이다. 아마 사오학년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때 “우리나라가 일본에 속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그때 당시 국력과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은 선진국이고 잘 사는 나라이었고 우리나라는 못살고 후진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배층은 누가 되어도
우리는 일본제국주의 36년 지배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당시 태어났던 사람들은 태어나 보니 식민지시대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1910년 한일병합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나라가 망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 일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민중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배층은 누가 되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지배층이 조선사람이 되든, ‘떼놈’이 되든, ‘왜놈’이 되든, ‘양키’가 되든, 누가 되든 나의 안전만을 지켜 준다면 문제없었을 것으로 본다. 민족의식과 국가의식이 희박한 시절에는 더욱더 그랬을 것이다. 이는 박완서 작가의 성장소설에서도 볼 수 있다.
박완서 작가의 대표적인 소설을 들라면 아마도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일 것이다. 작가가 개성에서 살다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이사 왔었는데 사대문 안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던 이야기가 있다. 식민지시절 민중의 한단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학부형회가 있으면 엄마는 꼭 참석을 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일인이고 학부형이 일본말을 모르는 경우에는 반장을 불러서 통역을 시켰다. 일본인 선생님 앞에 풀을 세게 먹인 뻣뻣한 무명옷을 뻗쳐입고, 쪽에 흑각 비녀를 꽂은 머리를 꽂꽃이 세우고, 꼬마 통역에 대한 배려라곤 조금도 없이 당신 하고 싶은 말을 엄숙하게 하고 있는 엄마를 바라본다는 것은 고문처럼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엄마의 개인적인 자존이었을 뿐 민족의식과는 상관이 없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엄마는 창씨 안 한 게 자식들에게 행여 어떤 불이익이 되어 돌아올까 봐만 지나치게 걱정했을 뿐, 만약에 불이익이나 박해를 받을 경우 자식들이 떳떳하게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줄 준비가 돼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바라는 자식의 출세도 물론 일제의 그늘 아래에서의 일일 뿐 조선의 자주적인 운명에 대한 바늘 구멍만 한 예감도 갖고 있지 않은 범용한 아낙에 지나지 않았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 131쪽)
박완서작가의 일제 때 초등학교 이야기를 보면 민중들의 삶이 대충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라가 망하고 난 다음 태어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식민지 지배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식민지배가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변절자들은 해방이 되었을 때 “이렇게 빨리 해방이 될 줄 몰랐습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어른들 역시 식민지배를 자연스럽게 받아 들인 것 같다. 이는 소설속에서 작가의 어머니를 보면 알 수 있다. 작가의 어머니 역시 보통 민중의 한사람이었다. 식민지 시절에 자식의 장래에 대해서만 걱정할 뿐 민족의식은 없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민중들은 지배층이 누가 되든 자신들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다고 보여 진다.
나라의 주인이 자주 바뀌는 혼란의 시대 때는 누가 주인이 되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세금을 적게 가져가고 안전만 지켜 준다면 설령 떼놈이든, 왜놈이든, 양키이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구한말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미군정에 이르기까지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즘 말로 하면 “민중들은 개돼지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초등학생 같은 발상
초등학교 시절 우리가 일본에 속해 있다면 일본과 같은 지위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초등학생 같은 발상이다. 이런 논리라면 우리나라가 미국에 속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런데 70년대 초반 초등학교 시절 우리나라가 미국에 속해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엄연한 독립국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발상은 대단히 유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단지 나라가 잘 사는 것 하나만 가지고 “일본의 일부가 되었더라면” 했던 발상이 놀랍다. 단지 일본이 잘 산다는 이유 하나였던 것이다. 이런 논리를 미국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미국의 일부가 된다면 우리는 미국처럼 잘 사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일본의 일부가 된다고 하여 일본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미국의 일부가 된다고 하여 미국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일부가 되면 일본의 ‘이등국민’이 될 것이다. 미국의 일부가 된다면 미국의 이등국민이 될 것이다. 이런 차별을 몰랐기 때문에 “일본에 속했으면” 또는 “미국에 속했으면” 하는 초등학생 같은 발상을 했다고 보여 진다.
미국의 일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
요즘 미국의 일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광화문 보수세력 집회를 보면 반드시 예외없이 성조기가 등장한다. 특히 개신교 대형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적극적이다. 그들은 집회할 때 “내게 강 같은 평화”로 시작되는 찬송가를 부르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교회에서 불렀던 것이다.
한국은 독립국가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나 깨어 있는 국민들이 생각하기에는 독립국가가 아니다. 자주국가도 아니다. 미국에 강하게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땅에 미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미국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어부가 미끼를 단 낚싯바늘을 깊은 연못에 던지면 눈을 가진 어떤 물고기가 그것을 삼키는 것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부의 낚싯바늘을 삼킨 물고기는 불행에 빠지고 재난에 빠져서 어부가 원하는 대로 이끌리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여기서 어부라는 것은 악마 빠삐만을 의미한다. 수행승들이여, 낚싯바늘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의미한다.”(S17.2)
미국의 일부가 되고 픈 사람들은 낚싯바늘을 문 것과 같다. 이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명예와 칭송까지 있다면 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제 강점시절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눈이 어두워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 그랬다. 일제시대 때 지배계층이 그랬다.
미국에 빌붙어서 미국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땅의 지배계층 상당수가 그렇다. 그들은 미국으로 유학간 사람들이다. 돌아와서는 기득권층이 되었다. 그들이 믿는 종교는 미국종교이다. 왜 그들이 그토록 성조기를 흔들어 대는지 이유가 될 것이다. 이에 민중들은 따라만 갈 뿐이다.
군산에서 접한 식민지 문화유산
식민지 시절 거리는 어땠을까? 그 시절에 태어나지 않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일제의 흔적이다. 특히 군산에 가면 식민지 유산을 볼 수 있다.
군산의 구도심을 걷다 보면 일본식 집을 볼 수 있다. 이층구조로 되어 있는 일본 특유의 가옥이다. 일본에 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옥형태이다. 이런 형태의 가옥은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다.
지난 9월 19일과 20일 이틀동안 1박2일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고군산군도 팬션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그런데 반드시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러야 할 투어코스가 있다. 군산 옛도심에 있는 일제시대 때 유산이다. 그 중에는 동국사도 있다.
동국사는 본래 일본절이었다. 일본 조동종에서 포교를 목적으로 건립한 사찰이었다. 어느 나라이든지 식민지 지배를 하면 자국의 종교를 전파한다. 일본의 경우 불교를 전파했다. 종파불교를 지향하는 일본불교에서 식민지에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는 것은 식민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동국사에서 이성당까지 걸어 보았다. 그런데 걷다 보니 마치 일본 어느 도시를 걷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일본풍이 종종 보였기 때문이다. 처마지붕이 있는 이층구조로 되어 있는 일본식 가게를 말한다. 그 중에 한일옥도 해당될 것이다.
군산에 3대 맛집이 있다. 한일옥, 지린성, 이성당을 말한다. 한일옥은 무우국 맛집으로 유명하고, 지린성은 고추짜장맛집으로 유명하고, 이성당은 빵집으로 유명하다. 모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이 중에 한일옥을 들어가 보았다.
한일옥은 겉보기에 일본풍 건물이다. 최근에 지어진 건물처럼 보이지만 식민지시절 일본식 건물 분위기를 풍긴다. 아마 이런 것도 마케팅전략일 것이다.
거리를 걷다 보면 식민지시절 이층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군산 항쟁관 명판이 붙어 있는 건물도 그 중의 하나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일본식 건물 중에 군산지청관사가 있다. 일제시대 당시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 뒤쪽에 있던 관사로서 판검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거리를 걷다 보면 수많은 일본식 건축물을 마주한다. 특히 음식점 등 가게가 많다. 그 중에는 노골적으로 ‘일본식 전통가옥’이라는 문구를 사용하여 홍보하기도 한다. 군산에서는 일본풍도 이제 홍보상품이 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 같다.
한때 일본문화 열등감을 가졌는데
흔히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말한다. 인도문화와 중국문화를 비교해 보면 인도문화가 더 높았다. 이는 불교의 전래로 알 수 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되었지만, 반대로 중국의 유교와 도교는 인도에서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고대 인도가 중국보다 정신문명이 더 높았음을 의미한다.
식민지시절 일본은 한국보다 문화가 더 높았다. 한국의 주류사회에서는 일본 것을 따라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보고 있는 일본풍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때 일본문화에 열등감을 가진 적이 있었다. 입사하고 나서 일본기술을 접하고 나서부터이다. 특히 전자산업의 경우 비교대상이 되지 않았다. 일본 것을 베끼기 바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1970년대 일이라고 한다. 어떤 기술자가 일본 부품을 그대로 베꼈다. 엎어 놓고 베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다 만들어 놓고 보니 특성이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 샤시에 구멍 하나를 뚫지 않았던 것이다. 고주파부품에서 홀이 있고 없음에 따라 특성에 있어서 차이가 났던 것이다.
베끼려면 확실하게 베껴야 한다. 어설프게 베끼면 죽도밥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엎어 놓고 베끼는 것을 데드카피(Dead Copy)라고 한다.
한국의 전자산업은 데드카피로부터 시작되었다. 엎어 놓고 베낀 것부터 시작하여 차츰 베끼기 시작했다. 베끼는데 있어서 응용기술이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데드카피부터 시작하여 차츰 응용하여 카피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입사했을 당시를 기준으로 했을 때 근접해 가거나 따라잡거나 추월한 것도 있다. 불과 한세대만에 기적을 일구어 낸 것이다.
일본풍의 가게 앞을 지나칠 때
이제 더 이상 일본에 대하여 문화적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입사했을 당시인 80년대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그때 당시에는 어떻게 하면 일본 것을 잘 베낄 것인지 고민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알아야 했다.
회사에서 일본어 교육을 시켰다. 누구든지 십입사원으로 입사하면 의무적으로 일본어를 배워야 했다. 특히 도시바, NEC, 후지츠, 미츠비시, 소니, 파나소닉 등 세계적인 전자업체에서 생산된 반도체를 어플리케이션 하려면 일본어를 알아야 했다. 그때 당시에 그들은 일본어로만 되어 있는 두툼한 데이터북을 출간했다.
많이 좁혀졌다고는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경제대국이고 기술대국이다. 그렇다고 일본의 일부가 되고자 하지 않는다. 일본에 대한 열등감도 거의 없어졌다. 그래서인지 일본풍의 가게 앞을 지나칠 때 그다지 불편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이제 관용적으로 된 것 같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2020-09-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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