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슬비 내리는 일요일 아침에
부슬비 내리는 일요일 아침이다. 날씨는 잔뜩 찌뿌려 있다. 이런 날은 살 맛 나지 않는 날이다. 아침 햇살 가득한 날과 비교된다. 더구나 늦가을에 내리는 비는 죽음의 비나 다름없다. 이는 사월에 내리는 생명의 비와 비교된다. 이 비로 인하여 농작물이 피해를 입고 간신히 매달려 있는 잎파리는 매가리없이 떨어질 것이다.
비오는 날 기분이 아무리 꿀꿀해도 집은 따뜻하다. 새로 이사 간 아파트는 난방이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이는 이사 가기 전에 살았던 낡은 아파트와 비교된다. 그 아파트에서는 10월과 11월이 가장 추웠다. 난방의 사각지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전기장판을 필요로 했다. 그런 세월을 15년 보냈다. 형벌 같은 삶이다. 중년운이 좋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모든 것이 경제적인 것이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안락한 삶은 경제적 조건에 크게 따른다. 늦가을 잠 잘 때 추위에서 해방되는 것만 해도 행복이다. 그 동안의 고생이 싹 잊혀진듯 하다. 아내의 노력이 크다. 오로지 절약할 줄 만 알았기 때문에 작은 평수이나마 내 집을 갖게 된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에 왔다. 눈만 뜨면 부리나케 달려오는 것이다. 십년도 넘은 일이다. 십삼년을 하루같이 매일, 주말에도 일단 나오는 것이다. 마치 직장처럼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이 행운인 것을 알았다.
최근 유튜브에서 노년특강을 들었다. 강창희 노후설계 전문가의 강연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이 있다. 남자가 정년이 되어서 집에 있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것이다.
남자가 집에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집안에 긴장과 갈등이 생겨 날 수 있음을 말한다. 남자가 삼식이 소리 듣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밥을 차려 먹는다고 해도 여자는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밥을 하는 등 이제까지 여자가 해 왔던 일을 해도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자가 바라는 것은 나가 주는 것이다. 아침 아홉시에 나가서 저녁 다섯 시에 들어오는 것을 가장 좋아 함을 말한다. 그래서 노후설계전문가는 남자가 정년이 되었어도 일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아침에 눈만 뜨면 집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다.
정년을 일찍 맞았다. 기술계통의 경우 정년이 짧다. 관리직으로 전향하여 크게 성공하지 않는 한 기술이 쓸모 없어지면 퇴출된다. 그래서 사오정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사오정이 되어서 집에서 있을 수가 없었다. 집에 있으면 폐인이 될 것 같았다. 어디 갈 곳도 없었다. 작은 사무실을 임대하여 직장처럼 다녔다. 임대료와 관리비가 꽤 들어 가기 때문에 놀릴 수가 없었다. 사무실 공유를 하기도 했다.
사무실을 풀 가동해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저녁에도 나오고 당연히 주말에도 나와야 한다. 이런 세월을 십년 이상 보내다 보니 일요일 아침 일찍 사무실에 나오는 것이 이제 마음이 편하다.
한 사무실에만 내리 13년째이다. 직장생활이라면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직장생활 20년을 되돌아보니 가장 오래 일한 직장이 7년이다. 그 다음에 많은 것이 4년짜리이다. 일년짜리도 있고 심지어 6개월짜리도 있었다. 그것 보다 더 짧은 것도 있었다.
직장을 얼마나 많이 옮겨 다녔는지 모른다. 옮겨 다닐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새롭게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트라우마라 볼 수 있다. 꿈속에서 쩔쩔매는 것이 좋은 예이다. 저 깊숙한 잠재의식 속에 있는 것이 발현된 것이다. 그것은 생존에 대한 것이다. 능력이 부족함에도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쩔쩔매는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전히 미래는 불안하다. 그럼에도 안심 인 것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생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안심인 것은 정년이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특별한 경험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래서 생존하는데 도움이 된다. 쩔쩔매는 꿈을 꾸다가 깨었을 때 그래도 안심이 되는 것은 잡(job)이 있기 때문이다.
부슬비 내리는 일요일 아침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실에 일찍 나와서 글을 쓴다. 어느 것이라도 좋다. 내키는 대로 쓴다. 그러나 길이 남을 글을 써야 한다. 읽어서 유익한 것이어야 한다. 후대 자신 있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도 하루 일과가 또 시작된다.
2020-11-0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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