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전도사를 만나거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마스크에 쓰여진 글씨이다. 길거리에서 받은 것이다. 마스크 한개와 함께 물티슈 하나, 그리고 '영생 얻는 길'이라는 소책자를 받았다.
처음에는 피해 가려고 했다. 사거리 길목을 지키고 있는 두 명의 젊은 남성 전도사를 비켜 가고자 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받기로 한 것이다. 받아서 손해 볼 것 없다. 요즘 코로나 시기라 마스크는 유용한 것이다. 물티슈 또한 매우 실용적이다.
전도사는 받아 주는 것에 대해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 선물을 건네 주면서 '영생 얻는 길'을 꼭 읽어 보라고 했다.
소책자는 명함 두 개 만한 사이즈로 15페이지에 달한다. '영생 얻는 길'이라는 소책자가 말해 주듯이 영원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겉페이지에 “당신은 어디서 영원울 보내시겠습니까?”라고 쓰여 있다.
소책자에 놀라운 말이 있다. 그것은 "우리는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릅니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불교에서도 자주 하는 말이다. 부처님은 '죽음에 대한 명상(maranausati)'을 하라고 했다. 오늘 밤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인간의 수명은 보장되어 있지 않음을 말한다. 기대수명을 말하고 백세시대를 말하지만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업생(業生)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은 업이 익어서 과보로 나타났을 때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모른다. 설령 사고사와 같이 우연의 피습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세히 보면 원인과 조건에 따른 것이다.
도처에 죽음의 요인은 깔려 있다. 문 밖에 나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아니 한 호흡기 동안에도 죽을 수 있다고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 지금 이 순간은 소중한 것이다. 한시도 헛되이 보낼 수 없다.
소책자를 보면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라고 해 놓았다. 여기서 자기힘이라는 것은 “도덕, 신행, 수양, 종교”라고 했다.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세상의 어떤 종교를 믿어도 구원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이는 다름아닌 배타적 구원관이다.
소책자에 언급된 배타적 구원관은 독선적 교리에 따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라고 해 놓았다.
소책자는 죄짐과 구원과 영생에 대해 설명해 놓았다.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메세지가 될 것이다. 맡겨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마치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마음으로 지은죄와 행위로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해 주세요."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는 자신이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업자득 또는 자작자수라 한다.
불교에 삼종외도설이 있다. 숙명론, 신의론, 우연론을 말한다. 업의 법칙에 따르면 모두 사견이 된다. 그 중에 신의론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한 부류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본다.”(A3.61)
누군가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이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 탓으로 돌릴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책임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즐겁고 행복하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지금 내가 괴롭고 힘들면 ‘하느님의 뜻이다’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이렇게 모든 느낌에 대하여 절대자 탓으로 돌리는 것을 ‘존우화작설(issaranimmānahetuvāda)’이라 한다.
어떤 괴로움이든지 접촉으로 발생된다. 눈과 귀 등 여섯 가지 감각접촉 영역에서 발생한다. 전생때문이라거나 절대자 탓이라나 우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 등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형상과 소리 등 여섯 가지 대상과 부딪쳤을 때 발생한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된다. 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작론'이라고 한다.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법칙을 말한다.
부처님의 업의 가르침에 따르면 전생이나 절대자나 우연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설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다.”(A3.61)라고 자신 있게 말씀한 것이다. 부처님은 이미 2500년 전에 연기법으로 사상의 평정을 이루었다.
오늘날 한국의 종교시장에서 기독교가 득세하고 있디. 부처님의 연기법과 업의 법칙에 따르면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무작론(akiriya)'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영원주의가 득세하는 것은 사람들이 아직도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2500년 전에 종결된 문제를 오늘날 길거리에서 접하고 있다. 이전에는 애써 피했지만 요즘엔 받아 준다. 서로 좋은 것이다. 주는 사람은 받아 주어서 고맙고, 받은 사람은 쓸모 있어서 좋은 것이다. 길거리 전도사를 만나거든 피하지 말아야 한다.
2020-10-3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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