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새벽에 경전외우기를 하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2. 10:34

새벽에 경전외우기를 하면

 

 

에왕 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사왓티양 위하라띠 제따와네 아나타삔디깟사 아라메.”팔정도경 서문에 있는 구절이다. 이 말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사밧티 시의 제따바나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라는 뜻이다. 이 구절 왼 것을 확인하고 그 다음 구절 외기에 들어갔다.

 

아리양 뵤 빅카웨 앗탕기깜 막감 데싯사미 위바짓사미 땅 수나따 사두깜 마나시까로타 바싯사미 띠 에왐 반떼 띠 코 떼 빅쿠 바가와또 빳짯소숨 바가와 에따드 아뵤짜꽤 긴 길이의 구절이다. 뜻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설하고 분별해 보이겠다. 잘 듣고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세존이시여, 알겠습니다.” 수행승들이 세존께 대답하자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S45.8)라고 되어 있다.

 

 

새벽 두 시대에 잠에서 깨었다. 마치 흙탕물이 가라앉은 듯 정신이 맑다. 방의 온도는 25도 정도로 적당하다. 새로 이사 온 후 한가지 변화가 있다면 더 이상 전기장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지난 20년 가까이 겨울만 되면 전기장판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이는 난방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새로 이사 온 아파트에서는 난방이 잘 되어서인지 한번도 전기장판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새벽에 일찍 깨면 정신이 맑다. 이럴 때 경전외우기를 하면 매우 효과적일 것 같다. 그래서 팔정도경을 빠알리어로 외우기로 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서 외울 경전 문구를 떠올려 본다. 로마나이즈화된 빠알리 문구를 사진 찍은 것 보듯이 떠 올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속으로 암송한다.

 

단어 하나를 떠 올릴 때 우리말 의미도 동시에 떠 올려 본다. 뜻도 모르고 생짜배기로 외는 것과 다르다. 신묘장구대라니 외울 때는 뜻도 모르고 외웠다. 다라니는 뜻을 알면 안된다고 한 이유도 있다. 그러다 보니 외우기가 무척 힘들었다. 더구나 처음 접하는 산스크리트어, 그것도 한문으로된 산스크리트어이다. 단어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이 말이 그 말 같아서 그야말로 무식하게, 무지막지 하게, 강제적으로, 우격다짐으로, 생짜배기 식으로 외웠다. 그러나 빠알리 경전외우기 할 때는 반드시 단어의 뜻을 알고 외운다. 빠알리어 공부도 되고 경전외우기도 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스스로 마음의 족쇄를 채워

 

팔정도경 외우기는 이제 시작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제자들을 불러 놓고 수행승들이여,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설하고 분별해 보이겠다. (Ariya vo bhikkhave, aṭṭhagika magga desissāmi, vibhajissāmi)”(S45.8)로 시작된다. 매일 새벽에 눈을 감고 이렇게 단어 하나하나를 떠 올렸을 때 마음에 새기게 된다. 한 구절, 한 문장을 외우기 위해서는 수십번 또는 수백번을 반복해야 한다. 학교 다닐 때 영어단어 외우는 것과 같다. 그런데 경전 외우기는 단어 외우기를 넘어서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것이다. 그것도 천 자가 넘는 긴 길이의 경이다. 그래서 고도로 집중해야 한다.

 

빠알리 팔정도경 도입부를 외웠다. 마음 속으로 다 외운 것을 확인했을 때 만족했다. 일종의 알 수 없는 충만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해냈다.”라는 강한 성취감이다. 천 자가 넘는 경을 다 외웠을 때 그 감격은 외워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경전외우기를 하는 것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남들이 본다면 쓸데 없는 짓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스스로에게 마음의 족쇄를 채워 목표를 달성해 가는 것이다. 남이 시켜서 할 수도 있지만 그것 보다 몇 배 어려운 것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가 이번에 하게 되었다. 첫 게송을 외웠더니 상쾌하기도 했고 통쾌하기도 했다. 이런 맛에 경전 외우기를 하는지 모른다.

 

게으르지 않기 위해서

 

경전외우기를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 게으르지 않기 위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감각적으로만 살 순 없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감각적 삶에는 삶의 이유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본능대로 살기 때문이다. 본능대로 산다는 것은 동물적 삶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본능적 삶은 또한 기계적 삶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마치 프로그램된 로보트처럼 사는 것이다.

 

감각적 삶은 오로지 오욕락을 즐기는 삶이다.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감촉으로 즐기는 삶을 살다 보면 게을러지기 쉽다.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다 보면 모든 것이 귀찮고 피곤해진다. 그런데 게으름뱅이에게 있어서 부지런한 것이 있다. 배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자는 것이다. 술이 댕기면 술을 마시는 등 감각이 하자는 대로 하는 데는 바쁜 것이다. 마치 어부가 던진 낙싯바늘을 덥썩 문 물고기와 같다.

 

감각의 노예가 되면 악마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것과 같다. 본래 즐기는 삶은 탐욕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불선업을 짓는 것이 된다. 아무 생각없이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은 불선업을 짓는 것이 되어서 악처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경전외우기를 하는 것은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다. 자신을 꽁꽁 묶어 놓고 길들이기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유의지를 기르기 위해서

 

경전외우기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자유의지에 대한 것이다. 경전외우기는 자유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것이 자유의지이다. 판단을 하거나 선택을 하는 것과 같은 소극적인 자유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담배끊기나 술끊기와 같은 적극적인 의지를 말한다.

 

중독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자유의지에 해당된다. 담배를 끊고자 했으나 금단현상으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물었을 때 이는 자유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다. 자신의 판단으로 살아 가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프로그램된 로보트와 같은 신세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도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뇌과학자들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음을 증명해 냈다. 인간은 대부분 본능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성적 판단을 하기는 하지만 이는 몸에서 먼저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자유의지를 어떻게 볼까?

 

부처님 가르침 중에 오온무아(五蘊無我)의 가르침이 있다. 이는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S22.59)라는 정형구로 표현된다. 정신과전문의 전현수 선생에 따르면 이와 같은 오온무아정형구에 대하여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라고 했다. 왜 그런가? 인간은 본래 탐, , 치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오온에 집착된 상태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오취온적 존재임을 말한다.

 

오취온적 존재로서 인간은 자유의지는 없다고 볼 수 있다. 탐욕으로 살고 분노로 살고 어리석음으로 사는 존재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예를 들어 설명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오온 중에서 물질이 있다. 부처님은 물질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이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S22.59)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에 대한 통제권이 없음을 말한다.

 

만약 이 몸이 내것이라면 늙지도 병들지도 말아야 한다. 만약 이 느낌이 내것이라면 호불호와 쾌불쾌에서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몸과 마음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지배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의지와 자유의지는 다른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결정이나 선택을 한다고 하는 것은 의지작용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모든 장애에서 자유로움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오장애를 들 수 있다. 탐욕, 분노,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의심을 말한다. 결국 탐, , 치에서 자유로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의지는 탐, , 치에서 자유로움이라고 볼 수 있다. , , 치에 자유롭다면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일 것이다. 해탈은 본질적으로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지향한다. 이는 다른 말로 대자유인이 되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말로 자유의지를 갖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면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을 제어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시각으로 형상을 보더라도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연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라며, 이어서 그는 그렇게 제어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한다.”(S35.239)라고 했다.

 

자신을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 자유의지를 가진 자이다. 새벽에 경전외우기를 하는 것도 자신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을 제어하는데 있어서 좌선도 있고 행선도 있고 간경도 있고 절수행도 있지만 그것 못지않게 경전외우기도 자유의지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효과가 있다. 무엇보다 강한 성취감이다. 다 외운 것을 확인했을 때 강한 성취감과 함께 승리감을 맛본다. 그것은 아마도 자유의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본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의지를 말한다. 경전외우기를 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기르기 위해서이다.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경전외우기 이점에는 게으르지 않기와 자유의지기르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마음의 족쇄를 채워 해 냈을 때 역설적으로 대자유를 만끽하는 것은 게의르지 않기와 자유의지기르기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경전외우기를 하다 보면 기억력도 좋아 진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머리를 엄청나게 굴리기 때문이다. 기억해 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과정이 두뇌를 회전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백세시대가 예상된다. 백세시대에 사람들은 건강을 가장 염려한다. 그 중에서도 치매일 것이다. 치매에 걸리면 인생이 끝장 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치매를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끊임없이 머리를 써야 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경전을 외우는 것이다.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좋고 음식을 꼭꼭 씹어 먹는 것도 치매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경전을 외우는 것만 못할 것이다.

 

경전외우기 이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경전외우기를 하면 잡념이 사라진다. 마치 호흡에 집중하면 망상이 일어나지 않은 것과 같다. 눈을 감고 마치 사진 찍은 것을 떠올려 보는 것처럼 문자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직이 단어 하나 하나 의미를 파악하면서 암송할 때 잡념이 있을 수 없다. 요즘처럼 시국이 어수선할 때 분노의 마음이 일어난다. 이럴 때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서 경전의 문구를 떠 올리면 분노의 마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경전외우기에 도전하기가 쉽지 않다. 여러 경을 외웠지만 글쓰기 보다 더 어려운 것이 경전외우기인 것 같다. 큰 마음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한번 돌입하면 끝장을 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천자나 되는 경을 거침없이 암송했을 때 그 기쁨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이 된다.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단지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다보면 동물적이고 기계적인 삶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사유할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에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청소부가 거리를 쓸지만 세상을 깨끗이 하고 있다고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숭고한 일이 된다. , , 치로 살아 가는 삶에서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 가고자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거룩한 삶이 된다. 경전외우기 역시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다. 대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2020-12-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