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혈

행위는 업(業)을 남기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12. 10:34

행위는 업(業)을 남기고


사무실 부재 중에 전화를 받았다. 택배기사는 감귤 한박스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물었다. 사무실 문 앞에 놓고 가라고 했다. 누가 보냈을까? 집히는 데는 있지만 확실히 다가오지는 않았다.

종종 제주에서 감귤박스 선물을 받는다. 해남으로 귀촌한 친구가 딸 편으로 보내기도 했다. 매년 6월에는 밤호박, 10월에는 꿀고구마를 홍보해 주고 있는데 이에 대한 답례로서 제주에서 귤농사를 짓고 있는 딸네를 통해 보내오는 것이다. 또 페북(페이스북)친구가 보내오기도 한다. 가서 확인해 보니 애월읍에 사는 페북친구가 보내온 것이다.

 


감귤은 제주 특산품이다. 수확철은 11월 부터 이맘 때인 것으로 알고 있다. 명품 감귤이다. 10키로 무게로 묵직하다. 열어보니 마트에서 파는 것과 달리 거뭇하다. 지금 막 딴 것처럼 풋풋하다. 제철에 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약이 된다고 했다. 싱싱한 감귤 맛은 어떨까? 마트에서 파는 것과 당도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달다. 그리고 시큼한 강도가 세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내었을까?

 

 

 


아마도 글 때문일 것이다. 매일 의무적으로 글을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리고 있는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 같다. 더구나 긴 글이다. 그리고 경전을 근거한 무미건조한 글이다. 읽다 지쳐서 막 넘긴다는 사람도 있다. 글의 양에 질려서 인지 근처에도 오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아마 남는 것이 있어서 일 것이다. 남는 것이 없다면 요즘처럼 시간이 돈인 시대에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제주법우님은 지난해에도 감귤박스를 보내온 바 있다. 받고 만 있을 수 없어서 한달 전에 이미우이(Imee Ooi) 음악씨디를 택배로 발송한 바 있다. 이에 대한 답례일까 연락도 하지 않고 보내왔다.

매일 의무적 글쓰기를 하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선물을 받는다. 주로 책이나 먹거리를 받는다. 책은 읽어 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세월만 간다. 늘 바쁜 일상에서 시간을 내야 한다. 보내 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읽어야 하나 여의치 않다. 그러나 먹거리는 부담 없다. 누구나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보내 준 이의 아름다운 마음을 생각하며 감사히 먹는다.

늘 염려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암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었다. 본의 아니게 암시가 되어서 받게 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계행편에서도 암시하는 것에 대해 금하는 조항이 있다.

선물은 받아서 기쁘고 주어서 즐거운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물은 공덕이 되는 행위에 해당된다. 청정도론 자애수행편을 보면 최종단계는 보시하는 것이다. 원한 맺힌 자라도 선물을 받으면 고개가 숙여지게 되어 있다. 선물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인간관계를 개선시킨다. 준다고 마음 먹었을 때 이미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늘 사람(천신)이 부처님에게 물었다. 하늘사람은 무엇을 베풀어 힘을 줍니까? 무엇을 베풀어 아름다움을 줍니까? 무엇을 베풀어 안락을 줍니까? 무엇을 베풀어 밝은 눈을 줍니까? 무엇을 베풀어 모든 것을 줍니까?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십시오.”(S1.42)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했다.


먹을 것을 베풀어 힘을 주고
옷을 베풀어 아름다움을 주고
탈 것을 베풀어 안락을 주고
등불을 베풀어 밝은 눈을 주네.

살 집을 베푸는 자는
모든 것을 주지만
가르침을 베푸는 사림이야말로
불사의 삶을 주는 자이네.”(S1.42)


장로가 보시자에게 축원할 때 아유 완노 수캉 발랑이라고 한다. “장수하시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십시오.”라는 말이다. 누구나 바라는 장수, 용모, 행복, 건강에 대한 축원이다. 이 보다 더 좋은 축원은 없다.

 

보시에는 먹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탈 것을 제공하는 것도 보시이다. 카풀 하는 것도 보시에 해당될 것이다. 무언가 고쳐 주는 것도 보시에 해당된다. 불이 나갔을 때 불이 들어오게 하는 것도 보시이다. 물론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도 당연히 보시에 해당된다.

게송에서는 먹을 것을 주는 것에 대하여 힘(健康)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옷은 아름다움(容貌), 탈 것은 안락(幸福)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게송에서 장수축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등불이 들어가 있다. 등불을 주는 것에 대해 밝은 눈을 준다고 했다. 이와 같은 네 가지는 세속에서 재가자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출가자라 하여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출가자도 보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재가자에게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이다. 법보시를 말한다.

재보시보다 법보시가 수승하다는 것은 불교인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다. 살 집을 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주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금강경에서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장엄하여 보시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전재산을 보시하는 것보다도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 훨씬 더 수승하다고 했다. 그를 열반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알려 주어서 다시 태어남이 없는 열반에 들게 하는 공덕이야말로 가장 큰 공덕일 것이다. 사구게 하나라도 알려 주는 공덕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장엄하여 보시하는 공덕보다 훨씬 더 큼을 말한다.

감귤은 시간 지나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준 행위는 남아 있다. 마치 그림자 같은 것이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끝까지 따라다닌다.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다. 죽어서도 따라다닌다. 행위는 온데간데 없다. 다만 업()을 남기고 사라질 뿐이다. 남는 것은 업밖에 없다.

오늘 글쓰기한 것을 누군가 보았다면 업이 된다. 그 사람에게 긍정적이라면 선업이 되는 행위를 한 것이다. 그 사람에게 불쾌와 괴로움을 유발하게 했다면 악업이 되는 행위를 한 것이다. 의무적 글쓰기로 인하여 누군가에 자극을 주었다면 글 쓴 사람의 업이다. 나는 그들에게 기쁨과 안락을 주고 있는가?

 

 

2020-12-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