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어차피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25. 08:00

어차피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또다시 아침을 맞았다. 어제와 다른 아침이다. 오늘은 오늘의 해가 뜬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 전개될까?


오늘은 크리스마스날이다. 예년과는 다르다. 바이러스가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기독교 최대명절도 조용히 보내는 것 같다. 평일과 다름없다. 지난 4월 부처님오신날 상황과 유사하다. 그때도 행사를 하지 않았다. 처음 맞는 재난에 당혹해 하는 것 같았다. 또 한편으로 아쉬웠던 것 같았다. 마침 윤달이어서 행사를 한달 후에 하기로 했다.

 

불교계에서는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한달 후 윤달 사월초파일에 치루었다. 그러나 흥이 나지 않았다. 마치 김빠진 맥주처럼 맥 빠진 행사가 되고 말았다. 그때 생각하기를 크리스마스도 연기해서 치룰까?”라는 것이었다. 코로나가 이렇게 오래 갈 줄 모르고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오늘 크리스마스날 아침이다. 아직 행사를 연기해서 치룬다는 소식은 들어 보지 못했다.

불가근불가원(
不可近不可遠), 늘 이 말을 명심한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리 하지도 않는 것이다. 지금은 불가근(不可近) 할 때이다. 너무 가깝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은 때가 온 것이다. 지난 세월 이런 때가 몇 차례 있었다.

 

TV도 안보고 뉴스도 보지 않으려 한다. “난리났다라고 유혹하는 유튜브도 멀리해야 한다.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글쓰기는 늘 해야 할 일이다. 지난 세월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또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는 경전외우기이다. 독서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한때 경전외우기를 발원했다. 법구경을 통째로 외워 보기로 한 것이다. 모두 26개품에 423게송에 달하는 법구경을 다 외운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다. 스리랑카에서는 구족계를 받기 전에 다 외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도 거꾸로도 외워야 한다는 것이다.

 

 

법구경은 무엇보다 내용이 좋다. 마음이 심난할 때 법구경 아무 곳이나 펼치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이는 진리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메커니즘과도 관련이 있다.

경전을 접함으로 인하여 심난한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마음은 한순간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마음을 나중의 마음이 밀어내면 현재의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서 나중의 마음이 현재의 마음이 되기 때문에 안정을 찾게 되는 것이다. 달마대사의 안심법문(
安心法門)’도 똑같은 이치라 볼 수 있다.

안심(
安心),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데 있어서 법구경만한 것이 없다. 게송 몇 개만 접해도 심난한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서 안심된다. 어찌 법구경뿐이겠는가? 숫따니빠따도 있고, 우다나, 이띠붓따까, 테라가타, 테리가타도 있다. 주로 게송으로 이루어진 경전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더한다면 상윳따니까야 제1사하가타이다. ‘시와 함께라는 뜻으로 게송을 모아 놓은 것이다. 남방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법구경과 숫따니빠따 못지 않은 인기 있는 경전이라고 한다.

 


법구경 등 위에 언급된 경전은 모두 다 읽어 보았다. 그러나 읽어 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거의 암송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방대한 니까야를 다 보기도 어려운데 게송만을 모아 놓은 경전을 암송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다. 심장법사나 되면 가능할지 모른다.

법구경은 결과적으로 외우지 못했다. 외우다 말았다. 1품과 제2품까지만 외웠다. 나머지 품은 언제 외워야 할지 기약이 없다. 나이 들어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외워야 할까?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 생으로 미루어야 할까? 왜 지금 당장 외우지 않는가?

아마 육칠년 된 것 같다. 법구경을 외우겠다고 블로그에 써 놓았다. 세상사람들과의 약속이다. 점심약속도 약속이라 했다. 한번 약속했으면 지켜야 할 것이다. 이번에 빠알리 팔정도경을 외우고 있는 것은 올해 7월 빤냐완따 스님을 찾아 뵈었을 때 약속한 것이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해를 넘기기 전에 외기로 했다. 거의 다 외워 간다.

수많은 경을 외웠다. 그것도 말이 생소한 빠알리어로 외웠다. 다 외우고 나면 통쾌했다. 고미숙선생은 유튜브 글쓰기 강연에서 글쓰기의 통쾌함에 대해 말 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외우기가 통쾌함이다.

 

유쾌, 상쾌, 통쾌라는 말이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읽기는 유쾌함이고, 쓰기는 상쾌함이고, 외우기에는 통쾌함이다. 외우기 할 때는 마치 하나, 둘 격파해 나가는 것 같다. 어제 외운 것을 확인했을 때 그 통쾌함이란 느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문제는 발생하고 사고는 일어나게 되어 있다. 나홀로 애태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인()과 연()이 작용해서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럴 때는 남에게, 관련자에게 맡기는 것도 괜찮다. 직접당사자가 아님에도 지나치게 가까이 한다면 타 버릴 것이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무관심과 방관으로 일관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재의 상황은 거시적 안목에서 본 다면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럴 때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상책이다. 글쓰기만한 것이 없다. 자신의 느낌을 써 내려 갈 때 심난한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안심(
安心)된다. 어차피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2020-12-2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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