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에
금요일 저녁이다. 월요일인가 싶으면 금요일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금요일 저녁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왜 하필이면 금요일 저녁일까?
하루가 빨리 지나간다. 아침인가 싶으면 저녁이다. 일주일이 빨리 간다. 월요일인가 싶으면 금요일이다. 세월이 빨리 흐른다. 1월인가 싶었는데 12월이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소년인가 싶은데 노년이다.”라고 말 할 수 있다. 결국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타자의 죽음을 본 적이 있다. 들어서 간접 경험한 것도 있다. 마지막 임종순간에는 눈을 뜰 힘도 없다고 한다. 당연히 손가락 하나 까딱거릴 힘도 없을 것이다. 삶은 죽음으로 끝난다. 언젠가 경험해야 할 것이다. 아침인가 싶으면 저녁이고, 월요일인가 싶으면 금요일이고, 1월인가 싶으면 12월이고, 소년인가 싶으면 노년이듯이 사는가 싶더니 죽음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작년 까지만 해도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화생했다면 마치 꿈에서 깨듯이 눈을 번쩍 뜰 것이다. 천상이라면 다행이지만 지옥, 아귀, 아수라라면 대략난감할지 모른다. 태에 들었을 때는 반복해야 한다. 또다시 유년시절, 청소년시절을 거쳐야 한다. 부모 잘 만나면 다행이지만 부모를 잘못 만나면 고생할 것이다. 이전 생에 했던 것처럼 똑같은 행위를 반복할 것이다. 이럴 때 “또 시작이군.”라고 말 하지 않을까?
돌고 도는 세상이다. 인생도 돌고 돈다. 그래서 유전하고 윤회한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 있는 한 끝이 없다.
수도없이 죽음의 침상에 누었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어떤 생각이 들어갈까? 죽음의 공포가 밀려 올 것이다. “아, 이렇게 끝나는구나.”라며 무력한 마음이 들 때 체념하게 될 것이다.
중학교때 연탄가스를 마신 적이 있다. 부엌에서 목욕했을 때이다. 수증기가 피어남에 따라 어지러워졌다. “빠져나가야 되는데.”라며 생각했지만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황홀한 경험을 했다. 목이 졸려 오는데 어느 순간 총천연색으로 보이면서 황홀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병원이었다. 산소마스크를 대자마자 깨어난 것이다. 이것도 어쩌면 임사체험일 것이다.
업무로 해외출장 갔었을 때의 일이다. 터키항공을 타고 이스탄불에서 두바이로 이동했다. 도중에 아비다비를 경유했다. 사막 위를 지났을 때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갑자기 “쾅”소리와 함께 짐이 쏟아져 내렸다. 비행기는 아래로 추락했다. 차창 밖에는 칠흑의 어둠으로 비까지 오고 있었다. 하늘에서 이런 일을 당하니 대책이 없었다. 바다라면 물에라도 뛰어들텐데 공중에서는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아,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승무원들은 태연했다. 겁에 질린 승객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어 주기도 했다. 공포의 시간이 지나자 기체는 진정되었다. 아부다비 공항에 내렸을 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결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타자가 죽는 것을 보지만 자신은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태어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라고 말 하는 사람도 있다. 있다면 삶만 있을 것이다. 오로지 삶만 이야기하면 단멸론자가 되기 쉽다. 단멸론자에게 삶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자궁에서 무덤사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부처님 제자라면 윤회를 믿어야 한다. 누군가 윤회를 부정한다면 그는 불교인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니까야를 보면 윤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조건발생하는 연기의 한 과정이다. 그럼에도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들도 있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도 윤회를 부정한다. 힌두교식 윤회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계급을 고착화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있다면 삶의 과정에서 순간윤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마하야나나 선종계통에서는 윤회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윤회를 말하면 저급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윤회를 부정하여 죽음이 닥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어갈까? 준비 없이 마주한 죽음에서 속수무책일지 모른다. 죽음의 공포에 떨지 모른다.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 대비하지 못했다면 석양에 산그늘 진 것처럼 두려움에 빠질지 모른다.
잘 태어나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잘 죽는 것이다. 임종의 순간까지 사띠를 유지하면 훌륭한 죽음이다.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지 모른다. 이를 사마시시(samasisi)라고 한다. 한번에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아라한의 삶이다. 또한 가장 이상적인 죽음 역시 아라한의 죽음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나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나는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고용된 자가 보수를 바라듯,
나의 시간을 기대한다.” (Thag.606)
“죽음을 기뻐하지도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7)
자아관념이 사라진 아라한에게 삶과 죽음이 있을 수 없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자에게만 삶과 죽음이 있다. 무아의 성자에게는 애초부터 삶도 죽음도 개념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나는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Thag.606)라고 한 것이다.
아라한에게 죽음은 불사(不死: amata)가 된다. 죽음자체가 시설되지 않기 때문에 불사라 한 것이다. 불사이면 다시 태어남이 없어서 불생이 된다. 그럼에도 불사라 한 것은 이번 생이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축복이다. 그래서 "나는 고용된 자가 보수를 바라듯, 나의 시간을 기대한다.”(Thag.606)라고 했다. 월급생활자가 월급 타는 날자를 기다리듯이 아라한은 죽을 때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어떻게 기다리는가?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7)라고 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사띠하는 것이다.
늙으면 나이타령을 하고 세월타령을 한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타령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저 헛되이 나이만 먹은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부끄러워할지어다, 가려한 늙음이여!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늙음이여
잠시 즐겁게 해주는 사람의 영상
늙어감에 따라 산산이 부서지네.
백 세를 살더라도 결국
죽음을 궁극적인 것으로 할 뿐
누구도 예외로 하지 않고
그것은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네.” (S48.41)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을 때 절망하게 될 것이다. 젊었을 때 청정한 삶도 살지 못했고 재산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면 마른 연못가에 있는 날개 부러진 늙은 왜가리 같은 신세가 된다.
아침인가 싶으면 저녁이고, 월요일인가 싶으면 저녁이다. 소년인가 싶었는데 노년이다. 결국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눈 뜰 힘도 없을 때 어떤 생각이 날까?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한다. 읽고 쓰고 외는 것이다. 불선법은 쳐내고 선법은 증장시키는 것이다. 자신을 바꾸어 놓았을 때 미소지으며 죽지 않을까?
2020-12-1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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