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블로거이다
제안을 받았다. 책을 한번 써 보라는 것이다. 출판사 대표로부터 받은 진정성 있는 제안이다. 니까야를 주제별로 분류하여 그에 걸맞는 글을 써서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이에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보내주신 장문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블로거입니다. 작가는 아닙니다. 그리고 생업이 있는 일인사업자입니다. 선생님이 제안한 것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현시점에서 아직까지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전에도 글에서 여러 번 밝혔는데 그저 블로거로서 만족합니다. 저의 방식대로 살고자 합니다. 선생님의 정성스러운 제안에 대하여 만족시켜 드리지 못해서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본래 제안은 가려 뽑은 니까야이다. 니까야가 방대하고 모두 구입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주제별로 분류하여 단행본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이는 니까야 번역자와 관련된 것이다. 니까야를 인용하여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주제별로 분류된 책은 이미 출간되어 있다.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을 말한다. 일아스님이 편집한 것으로 민족사 베스트셀러 중의 하나이다. 책을 보면, 근본가르침, 수행의 가르침, 계율의 가르침, 자비실천의 가르침, 평등의 가르침 등 여러 가지 주제를 주제별로 분류하여 해당 주제에 해당되는 경을 소개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 하나만 읽어도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대강을 알 수 있다. 니까야를 다 갖추기 전에 근거로 삼았던 책이다.
니까야는 이미 분류되어 있다. 경의 길이로 분류된 것도 있고, 주제별로 분류된 것도 있고, 법수별로 분류된 것도 있다. 어느 것이나 부처님의 말씀을 펼쳐 놓은 것이다. 이는 중복된 내용이 많음을 말한다. 이 니까야에서 간략하게 설해진 경은 저 니까야에 가면 길게 설해진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에서나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과 같은 근본가르침을 바탕으로 한다.
종종 질문을 받는다. 댓글이나 이메일로 문의한 질문을 보면 4부 니까야 중에 어느 니까야부터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먼저 상윳따니까야부터 볼 것을 권유한다. 왜 그런가? 주제별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방대하다. 모두 7권으로 되어 있어서 평생 보기도 벅찬 분량이다. 그래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는 한권으로 요약된 상윳따니까야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KPTS에서는 여러 니까야 요약본을 출간했다. 그 중의 한권은 현재 금요니까야 강독모임에서 교재로 사용되는 ‘생활속의 명상수행’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모두 9권에 달하는 방대한 앙굿따라니까야를 법수별로 핵심경만 요약해 놓은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비전문가가 함부로 경을 가려 뽑을 수 없다. 가능하면 전부 실려 있는 니까야를 구입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KPTS에서는 최근 통합본을 발간했다. 4부니까야 각각에 대하여 통합본 작업을 완료하고 율장통합본도 나왔다. 이는 한국불교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4부니까야가 번역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더구나 방대한 사부니까야에 대하여 각 니까야별로 통합본화 작업을 했다는 것은 니까야를 생활속에 들어오게 했음을 의미한다. 부처님의 원음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손안의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인터넷주문하면 누구나 사서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제안서를 받았을 때 당황했다. 단지 분류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해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니까야를 인용하여 글을 쓰는 입장에서 해당 영역이 아니어서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블로거로서 살겠다고 했다.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종종 소개시간에 ‘블로거’라고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세울 것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물론 직업을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인사업자로서 현재 하고 있는 ‘인쇄회로기판(PCB)설계업’을 말한다. 그러나 생업보다는 글쓰기이다. 돈도 안되는 글쓰기이지만 자신을 자신이게끔 만드는 것은 매일 의무적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블로거로서 삶에 충실하고자 한다.
글을 쓴다고 하여 모두 작가는 아니다. 글을 쓴다고 하여 모두 시인이 아니다. 글을 쓴다고 하여 모두 기자가 아니다. 각자 나름대로 영역이 있다. 분명한 사실은 글쓰기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를 창작의 고통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한줄의 글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사유를 필요로 한다. 단어 하나 선택하는데도 고민을 한다. 하물며 소설이나 시는 어떠할까?
아무나 작가가 되고 아무나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고의 시간을 가져야 작가라는 말을 들을 수 있고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달 수 있다. 블로거는 블로거의 길을 가야 한다. 누가 블로거라고 불러준 적이 없지만 블로그에 글을 쓰기 때문에 스스로 블로거라고 하는 것이다.
누구나 블로거가 될 수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 블로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자격증은 없다. 그래서 블로거라고 부르는 것이 편하다. 오늘도 내일도 나의 방식대로 쓸 뿐이다. 나는 블로거이다.
2020-12-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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