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로타리 추억여행
나의 나이는 몇살일까? 생물학적 나이를 망각할 때가 많다. 어느 시점에서 딱 멈추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초등학교 때는 아닌 것 같다. 중학교 때도 아닌 것 같다. 고등학교 때일까?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S1.4)
청춘은 우리를 버렸다. 중년도 우리를 버렸다. 노년도 우리를 버릴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청춘에 있다. 마음은 늙지 않는다.
혜화동 로타리 동양서림을 보니
오늘 오전 혜화동 로타리를 지나가다 차를 돌렸다. 30여분 여유가 있어서 추억여행을 해 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동양서림을 가보고자 했다.
서점이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놀랍다. 대체 언제적 서점인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있었는데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반가웠다.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경이로운 것이다. 마치 오래 전 사람을 본 것 같다. 세월이 무지막지 하게 흘렀음에도 그 이름 그대로 남아 있다니!
그때가 언제였던가? 1976, 1977, 1978이다. 지금으로 부터 45, 44, 43년 전이다. 동양서림의 역사를 보니 1953년이다. 1976년 기준으로 본다면 23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1976년에서 현재 2021년을 빼면 45년이다. 고1때 서점의 역사보다 지금은 두 배가 많은 세월이 흘렀다.
동양서림은 1953년 창립되었다. 53년생이므로 68세가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서울시 미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동양서림은 고1 때는 고작 23세 청년이었다. 지금은 68세 노인이 되었다. 그에 따라 이제 전설이 되었다. 고1때 서점이 지금도 있는 것이다. 동양서림을 보니 고1이 된 것 같다. 종종 내나이가 몇 살인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혜화동 로타리 동양서림을 보니 고1이 된 듯하다.
성벽 위에 세운 학교
혜화동 로타리는 아카데믹한 곳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로타리 주변에 여러 학교가 있었다. 대학교로는 성균관대와 카톨릭신학대가 있었다. 지금도 있다. 중고등학교로는 모교인 경신이 있고, 경신과 길 하나 사이에 보성이 있었다. 로타리 바로 옆에는 동성이 있다. 혜화여고도 있었다.
보성과 혜화여고는 다른 곳으로 이사갔다. 남은 것은 경신과 동성이다. 경신은 로터리에서 한참 들어가야 한다. 성북동 넘어가는 언덕배기 위에 자리잡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서울외곽성벽 위에 있다.
학교가 성벽 위에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서울외곽성벽은 이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그럼에도 성벽위에 학교 건물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언제 건물이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고등학교 입학할 때인 1976년에도 성벽 위에 있었고 지금도 성벽위에 있다는 것이다.
1976년 당시에도 성벽길이 있었다. 그때 성벽길을 걸으면서 등하교 했다. 그때 성벽이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이 될 줄은 몰랐다. 다만 성벽길을 걸으면 고즈넉해서 좋았다. 그러나 꼴불견이 있었다. 성벽을 울타리로 삼은 집이 있었고 성벽위에 축대를 쌓아 지은 집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카문명 축대 위에 성당을 지어 놓은 것 같다. 몰지각의 극치를 보는 것 같다.
성벽위의 집을 보고서 어린 마음에 불편했다. 문화재 관리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한 문화재 위에 집을 짓는 행위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45년이 지난 현재 조금도 변함없다.
경신학교 역시 성벽 위에 건립되었다.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커다란 5층 학교건물을 지은 것이다. 언제 지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때 난개발 되었을 것이다. 문화재 위에 집을 짓고 학교를 짓다니! 요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성벽 위의 집을 어찌할 것인가? 가장 좋은 것은 허무는 것이다. 성벽 위의 집을 철거하고 성벽을 본래 대로 복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신학교 건물도 철거 되어야 한다. 추억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성벽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성벽 위에 집과 학교를 지을 생각을 했을까? 착잡한 마음 금할 길 없다.
뺑뺑이의 비극
경신고등학교는 서울외곽성벽길을 타고 안쪽에 있다. 종로구와 성북구 경계선상에 있는 것이다. 성벽 안쪽 혜화동에 있기 때문에 사대문안에 있는 학교가 된다. 그래서 공동학군이 되었다. 학교 뒤에는 성북동이 있고 그 뒤에는 북한산 남장대가 보인다.
고등학교를 추첨으로 들어갔다. 좋은 학교가 걸리기를 바랬었다. 소위 5대공립이 걸리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전혀 생각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은 학교에 배정된 것이다. 그 결과 고교시절은 악몽이 되었다.
무엇이든지 첫경험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속된 말로 뺑뺑이로 배정받아 간 학교가 독실한 기독교학교였다.
1976년 2월 예비소집이 있었다. 처음 학교가는 날이었다. 학교에서는 처음 온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찬송가 ‘시온의 아침’ 가사와 음표가 적혀 있었다. 학교에서는 처음 온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찬송가를 가르쳐 주었다. “시온의 아침이 빛나는~”으로 시작되는 찬송가이다.
청소년의 마음은 하얀 도화지 같은 것이다. 어떤 종교가 선점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먼저 받아들인 종교가 있다면 어지간해서는 다음 종교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쪽은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학교때 불교를 받아 들였다. 그때 당시 종로5가 가까이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을 다녔기 때문이다. 중1때 ‘부처님의 일생’부터 배웠다. 아무 저항없이 받아들였다. 벌써 마음에는 불교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뺑뺑이로 배정받은 학교가 골수 기독교학교였다는 것이다.
고1때 헤맸다. 종교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이미 불교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기독교를 강요했다. 마치 학교에 들어온 모든 학생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방송예배,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성경시간, 한달에 한번 있는 운동장 전체예배, 특히 일년에 한번 있는 3일간은 수업을 전폐하고 대형교회 수련회에 참가해야 했다. 학교인지 교회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학교에서는 거의 매일 예배와 찬송이 울려 퍼졌다. 고3 방송수업시간 때의 일이다. 어느 선생은 수업중에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되는 기도를 하기도 했다. 성경시간에 성경선생은 번호순서대로 한사람씩 교탁에 올라가게 해서 기도하게 했다. 참으로 가혹한 조치였다.
고1때 학교는 죽도록 싫기만 한 끔찍한 곳이었다. 학교의 교훈은 ‘기독적 인격’이었다. 교회학교라고 볼 수 있다. 교가도 “주의 영광이”로 시작되었다.
뺑뺑이 이전에는 문제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배정받아 종교를 강요받았을 때 그것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학교를 다닌 3년 내내 정신적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마음 속으로 수없이 싸웠다. 신앙을 강요하면 할수록 거세게 반발했다. 이렇게 종교문제로 마음의 갈등을 겪게 되자 학업이 말이 아니었다. 한반 60명 중에 50등대를 했다.
고2가 되었다. 고1때처럼 살 수 없었다. 꿈속에서조차 싫은 학교였지만 입시준비는 해야 했다. 종교갈등으로 1년 보낸 것이 타격이 컸다. 이후 모든 것을 대학입시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2학년 겨울방학때 종로에 있는 학원을 다녔다. 특히 종로2가 관철동에 있었던 시사영어학원 건물에서 박동석 선생의 ‘수학II의 정석’ 두 달을 들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낮에는 학원에 다니고 밤에는 독서실에서 밤늦게까지 그야말로 ‘죽어라’고 공부했다.
수학을 잡고 나자 탄력이 붙었다. 고3때가 되었을 때 10에서 20위 권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파워가 없었다. 정보도 없었다. 부자집 자식들은 과외를 받던 시절이었다. 학원만 다니면서 공부한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막판에 10위권에 진입했다.
미우나고우나 모교는 모교이다. 비록 뺑뺑이이로 원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추억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친구가 없다. 공동학군인 이유도 있지만 종교갈등으로 인하여 고립되어 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축구는 좋았다. 경신은 축구명문이었기 때문이다.
1976년 고1때 개교 90주년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그때 당시 오비(OB)팀과 와이비(YB)팀의 축구시합이 열렸다. 경신출신 차범근과 김진국 등 국가대표축구선수들이 오비팀으로 참가했다. 현역으로는 박항서와 오석제가 있었다. 그때 당시 축구영웅 차범근에게 사인받았다. 학생들이 죽 둘러 싸고 사인받았는데 노트에다 받았다. 오랫동안 고이 간직했으나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박항서는 나중에 베트남 국가대표 축구감독이 되어서 베트남의 영웅취급을 받았다. 그때 박항서와 오석제는 3학년이었다.
소설가 성석제가 있다. 고1때 같은 반이었다. 그는 키가 작아서 앞번호였다. 교류는 없었지만 아마 문화부장을 맡은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때인가 성석제라는 이름이 떠서 확인해 보니 얼굴 그대로였다. 동안으로 얼굴형태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이제는 모두 지난 일
후문을 통하여 학교에 들어가 보았다. 방학이라 텅 비어 있다. 또 겨울이라 썰렁하다. 드넓은 운동장은 황량하다. 그러나 학교건물은 변함이 없다. 그때 당시로부터 45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성벽을 허물고 만든 계단형 스탠드도 그대로 있다.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경비가 깜짝놀란듯이 다가와서 “뭐요?”라고 물었다. 이에 “오랜만에 와 봤습니다.”라고 말했다.
인생에 있어서 고교 3년은 암흑기였다. 종교로 인하여 한없이 좌절했다. 어린 마음에 어찌할 수 없어서 전학도 수 없이 생각했다. 그러나 혼자 고민했을 뿐이다. 이를 ‘뺑뺑이의 비극’이라 본다. 하필 그런 시기에 학교를 다녔던 것이다.
그때 그당시에는 오로지 탈출만 꿈꾸었다. 강제적인 예배와 찬송으로 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 꼼짝없이 원치않는 예배와 찬송을 견디어내야 했다. 이것은 나중에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그때 그시절을 생각하면 몸서리치도록 싫었던 것이다. 한국기독교는 나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다.
인간에게 가치 있고 사랑스런 것이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모두 덧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쓰리고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것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혜화동 로타리에서부터 성벽길을 따라 경신학교까지 추억여행을 했다. 한때 아픔을 준 학교였으나 이제 모두 지난 일이다.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행복을 가져오는 공덕을 쌓아야 하리.” (S1.4)
2021-01-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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