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즐겨라”라는 말에 속지 말아야
“이제 즐기며 사십시오.” 나이드신 분에게 흔히 하는 말이다. 생일잔치 등 특별한 날에 덕담으로 하는 말이다. 정년퇴임을 한 사람에게도 즐기며 살라고 말한다. 그동안 일하느라고 즐기지 못했는데 이제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해외여행도 다니면서 맛있는 것도 사먹으면서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라는 것이다.
누구나 즐기는 삶을 산다. 즐기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즐거움을 찾아서 산다. 그래서 집성제를 보면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tatra tatrabhinandini)”(S56.11)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찾는다.”라는 뜻이다. 눈과 귀, 코와 혀, 몸, 그리고 정신으로 즐길거리를 찾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즐길거리를 찾아 끊임없이 두리번거린다. 한시도 멈추지 않는다. 그런 즐김에는 부자의 즐김도 있고 가난한 자의 즐김도 있다. 귀한 자의 즐김도 있고 천한 자의 즐김도 있다. 어른의 즐김도 있고 아이의 즐김도 있다. 세상사람들은 모두 각자 나름대로 즐길거리를 가지고 있다.
인생을 즐기라는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 “이제 인생을 즐기며 사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를 악마의 속삭임으로 보아야 한다. 왜 그런가? 즐기는 삶은 불선업을 짓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즐기는 삶이 왜 불선업인가? 이는 탐욕과 갈애라는 불선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에게 즐기는 삶은 있을 수 없다. 즐긴다는 것은 좋은 느낌을 즐긴다는 것이다. 당연히 싫은 느낌에 대해서는 배척한다. 이는 성냄으로 표출된다. 즐기는 삶은 탐욕으로 사는 것일 뿐만아니라 성냄으로 사는 것이기도 하다. 좋으면 거머쥐려 하고 싫으면 밀쳐 내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삶이다. 한마디로 즐기는 삶은 탐, 진, 치로 사는 것이 된다.
광고문구 중에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말이 있다. 이 말도 즐기는 삶을 살라는 말과 같다. 이렇게 사회 도처에서는 즐기며 살라고 한다. 즐기며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실제로 행복(happiness)을 뜻하는 빠알리어 수카(skha)는 즐거움(pleasure)이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 “행복하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는 “즐겁게 사십시오.”라고 말 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 ‘행복하게 사는 것과 즐겁게 사는 것에 대하여 시비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사람들에게는 행복하게 즐겁게 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사띠하십시오.”라든가, “공덕지으며 사십시오.”라고 말 해야 한다.
사띠(sati)와 공덕(puñña)은 선법이다. 선법을 행하면 선업이 되어 선한 과보를 받는다. 즐기는 삶을 살아 불선업을 짓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 즐기며 사십시오.”라는 말은 불선업을 지어서 악처에 떨어지라는 말과 같다.
긴 인생이다. 백세를 바라보는 시대에 긴 세월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즐기며 살라고 하지만 말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는 괴로운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고성제의 여덟 가지 괴로움을 알려 주는 것이 낫다.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 보았을 때 틀림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오욕락을 즐기는 행복론을 설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이것이 즐거움이다.”라고 하여 여러 가지 즐거움에 대한 낙성제(樂聖諦)를 설한 적이 없다. 다만 욕망을 여읜 행복에 대해서는 설했다. 그래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Dhp.204)라고 했다.
보시를 하면 장로는 축원을 해 준다. 법구경에서는 “아유 완노 수캉 발랑(āyu vaṇṇo sukhaṃ balaṃ)” (Dhp.109)라고 말한다. “장수하시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시기를!”라고 축원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다 지혜를 덧붙이기도 한다. 이것이 재가불자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축원이다. 사업이 잘 되게 한다든가 돈을 많이 벌게 하는 등 물질적 축원이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공덕을 많이 지으라는 것이다. 선업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난다면 왕권이 부럽지 않을 것이다.
축원중에서 최대축원은 아마 장수축원일 것이다. 누구나 오래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에게 “오래오래 사십시오.”라고 말한다. 그것도 하고 싶은 것 다하며 즐기며 살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장로가 장수축원을 하는 것은 이와 다르다. 장로가 장수축원하는 것은 공덕짓기 위해서 오래 살라는 것이다. 오래 살수록 공덕짓는 기간도 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 살되 용모도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여기에다 지혜롭게 살면 금상첨화이다. 이런 삶은 공덕행으로 성취된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말한다. 나이 들어 즐기는 삶이 행복한 삶이 아니라 공덕지으며 사는 것이 행복한 삶임을 알아야 한다.
새벽에 또 쳐 보았다. 엄지 치는 대로 간 것이다. 오늘은 수행자를 찾아 가는 날이다. 법우들과 점심공양청을 하는 날이다. 마음보는 수행, 심념처에 대해 들어 볼까 한다. 청정한 수행승을 찾아 공양 올리고 법문을 듣고 담마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2021-01-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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