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일이 생겼다
나에게 일이 생겼다. 과거 쓴 글을 하나의 파일에 옮기는 작업을 말한다. 블로그에 있는 글을 컴퓨터에 보관하는 작업이다. 최근 이틀에 걸쳐서 2012년 글과 2013년 글을 옮겼다. 일상의 이야기를 쓴 ‘진흙속의연꽃’방에 있는 글이다.
한달에 한두번 옮기려고 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몰아치기로 한 것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블로그가 해킹당하여 다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는 걱정아닌 걱정 같은 것이다. 이중삼중으로 안전장치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모르지 않은가?
2006년 부터 쓴 5,500개가 넘는 글을 모두 책으로 내고자 한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쓴 글은 이미 책으로 내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글이 워낙 많다보니 하세월이다. 이런 속도라면 10년 걸릴지 모른다. 그 10년 동안 또 새로운 글이 생산될 것이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블로거가 사망하면 그 블로그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요즘은 모든 것이 전산화 되어 있기 때문에 사망사실이 포털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블로그도 사라질 것이다. 블로그에 있는 글도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인생은 알 수 없다. 오늘 살아 있다고 해서 내일도 있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또 해킹당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다급해진다. 블로그에 있는 글을 한시바삐 보관해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시킬 수 없다. 물론 돈 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자신이 지은 업 자신이 거두어 들이는 것이다.
과거에 쓴 글을 책으로 내는 것도 일이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소일거리이다. 글을 쓰는 것도 재미 있지만 써 놓은 글을 책으로 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가는 것처럼 설레이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때로 창작의 고통도 따른다. 그러나 써놓고 나면 강한 쾌감이 따른다. 인터넷에 올려 공유했을 때 상쾌하다. 글이 자신에게도 이익되고 타인에게도 이익되는 글이라면 공덕이 될 것이다.
옛날에 쓴 글을 하나의 책으로 엮는 작업을 하는 것도 일이다. 켜켜이 쌓인 고층에서 가져와 파일을 만드는 것은 단순작업이다. 오른쪽 마우스버튼을 이용하여 긁은 다음에 콘트롤씨와 콘트롤브이로 옮기는 작업이다. 글의 양이 많다보니 한해 글은 하루가 걸린다. 앞으로 한달 정도면 과거에 쓴 글을 모두 긁어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이를 먹은 것일까? 과거 개발했던 것, 과거 업무노트 등을 책장에 진열해 놓았다. 이번에는 과거 써 놓은 글을 서적화 작업하고 있다. 마치 인생을 다 산 것처럼 자신의 행적을 정리하는 것 같다. 그런 나의 인생은 어떤 것일까?
인생에 특별한 것이 없다. 부와 명예와 권력, 이런 것들과는 친하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여건 속에서 그대로 그렇게 살았다. 인생이 늘 내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절절하게 알게 된 것은 불교를 접하고 나서부터이다. 특히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구절을 접하고 나서 부터이다. 이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위대한 오온무아의 가르침이다.
인생의 후반전은 가르침과 함께 살고 있다. 인생의 전반전은 멋도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무지했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그것도 초기불교 가르침을 만난 것은 피난처를 찾은 것 같다. 이럴 때 이런 게송이 떠오른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이들 진리를 보았으니
존재의 통로는 부수어졌고
괴로움의 뿌리는 끊어졌고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어졌네.” (D16. S56.21)
그동안 헤맸었다. 가르침을 접하기 전에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 늘 마음 한켠은 허전 했다. 분명히 인생의 해법이 있을 것 같았다.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30대 후반부터 불교에 입문하려고 노력했다. 불교를 접하면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해법이 분명히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생업으로 인하여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사는 지역에 교회는 넘쳐 나지만 절은 보이지 않는다. 설령 절이 있다고 하더라도 고민을 만족시켜 줄지는 의문이다. 이렇게 한 해, 두 해 세월만 갔다. 사십대 중반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인터넷 검색하여 강남에 있는 포교당을 찾아 갔다. 2004년의 일이다. 직장이 있는 성남 야탑에서 강남 개포동까지 저녁에 다녔다. 불교에 입문한 것이다.
무엇이든지 시작이 중요하다. 일단 시동을 걸어 놓으면 목적지까지 가게 되어 있다. 불교교양대학에 다니게 되면서 이것 저것 알게 되었다. 스님은 열심히 기도하라고 했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하여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十二緣起)를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2009년도의 일이다.
오랜 세월 헤맸다. 불교를 만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헤맸을 것이다. 헤맨 것은 이번 생만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오랜 세월 헤매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마침내 가르침을 접하고 “바로 이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사성제에서 고성제에 대한 가르침을 나의 처지에 비추어 보니 틀림없는 사실로 드러났다.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를 접하고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덟 가지 괴로움을 자신에게 대입해 보았을 때 틀림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비로소 진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확신에 찬 믿음이다.
가르침과 함께 살고 있다. 가르침에 근거하여 매일 쓰고 있다. 쓴 것을 인터넷에 올려서 공유하고 있다. 요즘에는 과거에 쓴 것을 책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이것도 일이다. 수천개에 달하는 글을 긁어모으고, 이를 편집하여 책으로 만드는 것이 일인 것이다. 책처럼 보이기 위해 서문도 쓰고 목차도 단다. 이런 작업을 일없이 하려고 한다. 틈만 나면 옮기고 편집하려고 한다. 나에게 또 하나 일이 생겼다.
2021-01-1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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