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대하는 태도
또다시 새벽시간이다. 스마트폰을 보니 세 시 반이다. 미얀마 선원이라면 종칠 시간이다. 네 시부터 시작하는 첫 번째 좌선에 참가하라는 신호를 말한다. 수행처에서는 이렇게 남들이 다 잠들어 있는 시간에 하루일과를 시작한다.
새벽은 성찰하기 좋은 시작이다. 풀리지 않은 문제에 대해 사유해 본다. 인간의 힘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있고 풀 수 없는 문제도 있다. 스쿼트를 과도하게 하다가 허리가 아팠는데 이는 문제도 아니다. 시간과 함께 해결되는 문제는 문제축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정말 허리의 통증은 날자가 지나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렇다면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에스엔에스에서 어떤 사람의 글을 보았다. 숲속에 살며 인생과 자연과 우주를 관조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인생을 괴롭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을 복받은 인생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잘 풀려서 매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이런 글을 접했을 때 “어,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했다.
인생은 즐거운 것일까? 지금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여 인생은 즐거운 것, 인생은 행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지금 여기서 불행이 닥친다면? 함부로 행복을 말해서는 안된다.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순간이기도 하다.
작가 박완서는 88년도에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이전에는 인생이 너무 잘 풀려서 불안했다고 한다. 마치 “이 행복이 깨질까봐”라며 겁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조심조심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그결과 찾은 곳이 성당이라고 했다. 그런데 성당 다니고 몇 년 되지 않아서 불행이 찾아온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절대자를 원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절대자는 침묵만 할 뿐 답을 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실아 가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하필이면 나에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것이 나에게 현실이 되었을 때 당혹해 살 것이다. 어떤 이는 운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억울한 것을 “재수가 없어서”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행불행은 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 있다. 그는 늘 겸손하다. 그가 하는 말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죠.”라고 말한다.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이다. 자신의 능력보다는 운으로 돌리는 것이다. 왜 그럴까? 사업을 하기 위한 여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그 사업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단지 기회를 잘 잡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업이 성공하기 위한 사회적, 시대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사업이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 구성원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빌 게이츠는 천문학적 금액에 달하는 기부금을 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앞날은 알 수 없다.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이 행복이 계속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다. 어떤 불선업이 익어서 결과로 나타날지 모른다.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으로부터도 영향 받는다. 자신만 잘 한다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운전할 때 방어운전하며 달리지만 뒤에서 들이 박으면 불행이 시작된다. 불행에 빠질 조건은 차고도 넘친다. 잠시 행복을 맛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 말은 사람들은 “행운을 바란다.”라고 바꾸어 말 할 수 있다. 행불행은 운에 달려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운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이왕이면 “행운이 나에게 임하기를!”라고 바라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도 말씀하신 것이다. 대표적으로 망갈라경(Sn.2.4)을 들 수 있다.
행운도 조짐이 있는 것일까?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신호등이 파란불만 연속으로 있다면 오늘 하루는 잘 풀리는 날이 될까? 돼지꿈을 꾸었다면 복권을 사야 할까? 꿈에는 예지가 있는 것일까? 아침에 누군가를 보았다면 “아침부터 재수없게”라고 말 할지 모른다. 이런 것이 행불행과 관련 있을까?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한 것에 있다. 착하고 건전하게 살면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고 한다.
망갈라경에서는 22가지 행복의 조건이 설해져 있다. 그 중의 몇 개를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Stn.262)라든가,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Stn.263)등과 같이 일상에 대한 것이 많다. 이런 조건과 조건이 결합되고 쌓이면 행복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행복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단지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행운이 찾아올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상서롭다’는 뜻을 가진 망갈라(maṅgala)라는 말을 사용한다. 망갈라숫따는 행복경이 아니라 축복경이라고 번역하는 이유가 된다.
행복과 불행은 운에 달려 있다. 지금 잘 나가다가도 조금만 삐끗하면 천길 낭떠러지이다. 운전 중에 주의하지 않으면 지옥이 될 수 있다. 불운에도 조짐이 있다. 불운에 이를 조건을 갖추었을 때 불행이 찾아온다. 그래서 숫따니빠따를 보면 축복경과 대척점에 파멸경(parābhavasutta, Sn.1.6)이 있다. 파멸에 이르는 조건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다. 역시 일상에 대한 것이 많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여색에 미치고, 술에 중독되고 도박에 빠져있어, 버는 것마다 없애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tn.106)라는 게송도 있다.
미래는 알 수 없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그것은 과거 지은 업 때문이다. 선업이 익으면 행운으로 나타날 것이고, 불선업이 익으면 불행하게 될 것이다. 단지 아침에 어떤 현상을 보고서 행불행을 점 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과거에 뿌려 놓은 씨앗이 익었을 때 결과로서 나타난다. 이렇게 본다면 나에게 불운이 닥쳤다고 해서 억울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불운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그 뿐이다.
숲속에 사는 사람은 인생은 행복한 것이라고 했다. 복받은 인생은 그렇게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만일 수 있다. 언제 불행으로 바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부로 행복을 말해서는 안된다. 행복보다는 행운을 말해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축복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망갈라숫따라 하여 축복경을 설했다. 행복하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경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최상의 행복은 지금 여기서 행복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행복해야 한다. 이 두 조건을 만족시키는 말이 축복이다. 부처님이 축복경을 설한 이유라고 본다.
“세상살이 많은 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슬픔 없이 티끌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8)
“이러한 방법으로 그 길을 따르면,
어디서든 실패하지 아니하고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9)
2021-01-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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