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분류작업을 하면서 충만함을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오늘이 그날이다. 오늘 토요일 마음먹고 그 동안 미루어 왔던 노트를 정리했다. 업무노트, 강연노트, 수행노트 등을 말한다.
어떻게 해야 잘 정리할 수 있을까? 불쑥 떠 오른 것은 ‘라벨’을 붙이는 것이었다. 견출지를 사서 연도와 달과 내용을 간략하게 기입하는 것이다. 오늘 오전부터 오후내내 견출지 붙이는 작업을 했다. 그 결과 업무노트는 86권, 강연노트는 11권, 수행기는 6권, 순례기는 3권이다. 모두 합하면 106권이다.
기록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기록하고자
크고 작은 106권의 노트를 탁자위에 놓으니 가득 되었다. 이것도 한 존재의 삶의 흔적일까? 그렇다. 삶의 흔적이자 삶의 기록이다. 1980년대부터 쓴 것들이다.
106권 중에 업무노트가 86권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1987년부터 2005년 동안 18년동안의 기록은 순수한 업무노트이다. 2005년 이후 일인사업자로 일했는데 업무와 관련된 것과 글쓰기와 관련된 것이 혼재되어 있다. 일하면서 방송을 듣고 메모하다 보니 혼재된 것이다. 메모한 것은 모두 글로 남겼다. 2006년부터 블로그에 글로 남긴 것이다.
견출지 작업을 하다 보니 가장 오래된 것이 1987년에 작성된 업무노트이다. 동시에 연구노트가 된다. 개발자로서 테스트한 것이 도면과 그림과 함께 실려 있다. 이후 기록을 남겼다. 업무노트에 “기록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기록하자.”라는 결심을 한 것이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사업부내에 일본 고문의 영향이 크다.
회사에 입사한 것은 1985년 7월이다. 그때 당시 그룹공채로 들어갔다. 이십여일 연수교육을 받고 배치된 곳은 수원 매탄동에 있는 S전기이다. 처음에는 잘 적응하지 못해 헤맸다.
입사 3년차가 되고 나서야 본격적인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업부에 일본 기술고문이 있었는데 노트하는 것을 보고 배웠다. 실험한 것을 노트에 꼬박꼬박 기록하고 보고서를 쓰는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일본은 전자대국이었다. 회사 사업부마다 일본고문이 있어서 기술을 전수받던 시대였다. 일본이 전자대국이 된 데는 기록이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노트에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록했다. 이를 본받았다.
노트를 잃어버렸을 때는
1987년 이후 업무노트에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실험데이터는 물론 회의내용도 기록했다. 회로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에 대하여 스케치도 했다. 심지어 그날의 기분도 약간 기록해 두었다. 그래서 낙서도 볼 수 있다.
한번 기록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자 여러 회사를 옮겨 다녔을 때도 기록했다. 노트를 열어 보면 회사조직도도 있다. 주소록도 있어서 그때 당시 누구와 상대했는지도 알 수 있다. 회사를 여러 번 옮겨 다녔어도 노트와 개발제품 만큼은 반드시 챙겼다. 그 결과 30년이 지난 지금도 업무노트와 개발제품이 사무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업무노트는 34년된 것도 있고, 20년 된 것도 있고, 10년된 것도 있다. 그렇다고 업무노트를 빠짐없이 다 챙긴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잊어버린 것도 있다. 몇달치 기록에 공백이 생긴 것이다. 노트를 잃어버렸을 때는 가슴이 아팠다. 마치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허전했다. 회사를 여러 번 옮겨 다니고 이사를 수 없이 다녔어도 박스에 넣어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 이제 이순을 넘긴 시점에서 책장을 마련하여 진열해 놓고자 한다.
내것이 아니어서
회사생활은 1985년부터 2005년까지 20년했다. 업무노트를 보면 오로지 일에 대한 것만 있다. 회사와 집만 왕래하는 삶을 산 것이다. 개발된 것은 대부분 수출되었다. 그래서 자부심으로 살았다.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한다는 자긍심을 말한다.
반드시 총을 들고 철책선을 지켜야만 애국하는 것이 아니다. 달러를 벌이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이라 생각했었다. 무엇보다 생산적인 일에 종사한다는 자부심으로 살았다. 소비적인 일이 아님을 다행스럽게 여긴 것이다. 그래서 일을 해도 힘든지 몰랐다. 한창 때인 30대 때는 밤낮없이, 주말없이, 휴가없이 일했다.
회사와 집과 왕래하다 보니 세월이 무척 빠르게 흘러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기술은 점점 낡아만 갔다. 아날로그 기술로는 디지털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그 분기점은 2000년을 전후한 시기이다. 결국 퇴출되고 말았다. 내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2005년 이후 전혀 다른 삶을
2005년 이후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2005년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가 없어서 홀로서기를 했다. 이것 저것 해 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해 보았던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았다. 인쇄회로기판(PCB)설계업을 말한다.
인쇄회로기판설계는 주요 개발과정 중의 하나이다. 20년동안 회사생활 하면서 실무를 손에서 놓지 않았었는데 홀로서기 할 때 도움이 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PCB설계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인사업자로 살다 보니 자유가 있었다.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았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글을 쓰기로 했다. 2005년 처음으로 블로그를 만들었다. 2006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매일 쓰다시피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스스로 ‘의무적 글쓰기’라고 말하고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쓰다 보니 업무와 글쓰기가 병행되었다. 일하면서 쓰고, 쓰면서 일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업무노트에는 글쓰기와 관련된 메모가 있게 되었다. 특히 불교방송이나 불교TV에서 녹취하여 받아 적은 것이 많다. 이와 같은 메모를 바탕으로 하여 글을 썼다. 모두 블로그에 저장되어 있다.
업무와 글쓰기를 병행하다 보니 어느 때는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업무가 주이고 글쓰기가 객이어야 하는데 거꾸로 된 것을 말한다. 글쓰기에 탄력을 받았을 때이다. 현재 시점에서 본다면 남아 있는 것은 글 밖에 없다. 업무를 하여 번 돈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다. 다만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록한 업무노트는 남아 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금강경노트
견출지 작업을 하다가 발견한 것이 있다. 2004년 처음 불교에 입문했을 때 전용노트를 발견한 것이다. 또 2009년 초기불교 강연을 들었을 때 노트도 발견했다. 이 두 노트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당시 전용노트를 만들어 강의 내용을 받아 적은 것이다.
2004년 노트는 어떤 것일까? 열어 보니 2004년 7월부터 12월까지 기록이다. 2004년 상반기때 불교입문교육을 받고 불교인이 되었다. 선원에서는 묶어 두고자 했었던 같다. 곧바로 금강경 강좌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노트에는 금강경노트라고 되어 있다.
노트를 보니 수업은 매주 목요일 저녁 한번 있었다. 제1교시는 조용길 교수가 아함성전을 강의했고, 제2교시는 지광스님이 금강경을 강의했다. 전반기 때 불교입문교육할 때는 그저 듣기만 했지만 금강경 강의할 때는 노트를 철저하게 했다. 강의한 것을 모두 받아 적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글로 나타나지 않았다. 회사다니면서 야간에 다녔고, 블로그를 만들기 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초기불교 노트의 발견
또 하나 발견한 노트는 초기불교에 대한 것이다. 2009년 1년동안 강남 논현동에 있는 한국명상원에 다닌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때 당시 묘원법사가 지도했다.
교육은 법문과 행선, 좌선, 인터뷰 순으로 진행되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했는데 9시 넘어 10시 가까이 되어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교재는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十二緣起)였다.
노트를 열어 보았다. 법문시간에 받아 적은 것을 보니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대한 것이 많다. 재생연결식, 바왕가 등의 이야기도 있다. 이는 교재가 니까야와 주석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트한 것을 열어 보았다. 눈에 띄는 것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조건에 의하여 사라진다. 그 조건은 내가 만든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서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것이 수행이다.”라는 메모도 적혀 있다.
노트에는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기록해 놓았다. 법사가 말한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인터뷰한 내용도 기록해 놓았다. 남이 인터뷰한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해외성지순례 갔었을 때도
노트하는 습관은 해외성지순례 갔었을 때도 계속되었다. 2011년 이후 매년 한차례 성지순례 발원을 했다. 그 결과 중국, 일본, 실크로드, 인도, 미얀마를 가게 되었다. 이번에 견출지 작업을 하다 일본성지순례와 실크로드성지순례에 대한 것을 찾아내었다.
2011년 처음 순례 갔었을 때는 메모하지 않았다. 다음에 갈 때는 메모노트를 준비했다. 손 안에 들어가는 작은 노트를 말한다. 그리고 목거리가 있는 볼펜을 준비했다. 그래서 가이드가 한 말을 빠짐없이 받아 적었다. 모호한 것은 직접 물어보았다. 여행지에서는 가이드 뒤에 바싹 붙어 따라다니면서 메모하고 사진도 찍었다.
순례노트는 여행기를 작성할 때 도움이 되었다. 사진과 노트를 보고 순례기를 작성한 것이다. 블로그에 글과 사진과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수행기도 작성했는데
수행기도 작성했다. 2019년 미얀마 담마마마까 국제선원에서 머물 때 일을 기록한 것이다. 처음부터 순례기를 작성하려고 마음먹고 갔었기 때문에 시간단위로 기록을 남겼다. 그 결과 두꺼운 노트 하나를 다 쓰게 되었다. 노트가 부족해서 종무소에서 두께가 얇은 노트를 얻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자 함께 갔었던 스님이 자신의 노트를 주었다.
미얀마에서는 14일 있었다. 12일 수행하고 남은 2일 동안은 수행센터 투어와 양곤시내 성지를 순례했다. 이 모든 것을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겼다.
2019년 7월에는 직지사에서 위빠사나 템플스테이 했었다. 5박6일동안 진행되었는데 강도가 높았다. 10일 코스를 압축해서 한 것이다. 법문, 행선, 좌선, 인터뷰 순으로 진행됐다. 이 모든 과정도 빠짐없이 메모해 두었다.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블로그에 수행기를 남겼다.
노트 분류작업을 하면서 충만함을
언제 어느 때든지 메모를 한다. 니까야강독모임이 열리면 빠짐없이 메모한다.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글을 작성한다. 각종 강연에 참석하면 역시 메모한다. 글을 쓰기 위한 메모이다. 이와 같은 강연메모노트는 11권에 달한다. 그러나 업무노트와 혼재된 것까지 합하면 더 많다.
책장을 하나 주문했다. 이제까지 노트를 박스에 보관하거나 그냥 쌓아 놓기만 했다. 오래 전부터 분류작업을 하여 정리하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이 그날이 되었다. 이제 인터넷 주문한 책장이 도착하면 마치 책처럼 진열될 것이다.
확실히 나이를 먹은 것 같다. 예전에는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실천하지 않았다. 이렇게 분류작업하는 것은 삶의 흔적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업무노트가 별다른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둔 것은 삶의 흔적 때문이다.
어느 때 업무 노트를 열어 보면 흔적이 보인다. 그때 고민했었던 것도 있고 그때 당시 사람들 이름도 있다. 또 명함을 붙여 놓았는데 시기에 따라 회사명칭도 다르고 직위도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은 이름이다.
수십년된 업무노트를 보관하고 개발품을 지니고 있는 것은 어쩌면 집착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고귀한 일이 된다. 오늘 100권이 넘는 노트를 보면서 “이것이 나의 인생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연도와 달, 그리고 내용에 대한 견출지 작업을 하면서 충만함을 느꼈다.
2021-01-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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