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탕물이 가라 앉은 것처럼
새벽에 고요를 맛보고 있다. 좌선으로 얻어지는 고요는 아니다. 흙탕물이 가라앉듯이 동요가 없는 일시적 고요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고요를 즐긴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는다.
나홀로 사는 세상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극받게 되어 있다. 보는 것으로 듣는 것으로 자극받는다. 보는 것이 80%가량이고 듣는 것은 10%가량 되는 것 같다. 나머지는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감촉에 의한 것이다.
형상과 소리를 접하면 동요한다. 아비담마에서는 바왕가의 동요라고 한다. 한존재에게는 자신만의 존재지속심이 있는데 외부대상에 따라 동요가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강도가 세면 바왕가가 끊어지고 대상으로 향하게 된다. 이른바 대상과 접촉이 발생된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새벽이 되면 뉴스도 보지 않고 에스엔에스도 하지 않는다. 지금 고요를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문은 어쩔 수 없다. 떠 오르는 생각은 막을 수 없다. 이럴 때 성찰이 일어난다.
부끄럽고 창피한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말 할 수 없다. 비밀이다. 비밀은 아무에게나 털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친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절친은 비밀을 지켜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인도 대상이 될 수 있다. 신부, 목회자, 스님이 말을 들어주는 것을 말한다. 의사도 될 수 있고 상담사도 될 수 있다. 비밀을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산다. 집에서의 가면이 있고 직장에서의 가면도 있다. 모임에서의 가면도 있다. 좀처럼 본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역할놀이에 충실한다. 굳이 내면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가능하면 좋은 면을 보여주려고 한다. 좋은 이미지를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자랑으로 나타난다.
겉모습만 보고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본모습을 보면 실망하기 쉽다. 그가 고고한척하지만 경계에 부딪치면 드러난다. 상대방이 자극을 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흔들리지 않는다. 보는 것, 듣는 것 등 대상의 강도가 세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 어떤 법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를 법념처라 해야 할 것이다.
“담메수 담마누빳시 위하라띠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 도마낫상”
요즘 암송하고 있는 팔정도경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삼마사띠에서 법념처에 대한 것이다. 풀이하면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사실에 대하여 사실을 관찰한다.”(S45.8)가 된다.
대상과 접했을 때 알아차려야 한다. 아무생각없이 접하면 대상에 끄달려 간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게송에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아빗자(탐욕)와 도마나사(근심)이다.
새벽에 에스엔에스를 하지 않는다. 뉴스도 보지 않는다. 다만 제목만 슬쩍 볼 때가 있다. 그것도 자극적인 것이다. 낚시에 걸려들면 안된다. 주관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벽에는 흙탕물이 가라 앉은 것처럼 고요하다. 그러나 일상이 시작되면 다시 흙탕물이 될 것이다. 오늘도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2021-01-0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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