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슬픔을 노래하는 시인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 13. 17:45

슬픔을 노래하는 시인

 

 

시인은 슬픔을 노래한다. 시인의 시에는 슬픔이 빠질 날이 없다. 시인은 왜 슬프다고 할까? 몸이 늙어 가는 것도 슬픈 것이고, 몸이 병들어 가는 것도 슬픔이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슬픔이다. 시인에게는 삶 자체가 슬픔이다.

 

우리말로 슬픔은 괴로움과 거의 동의어이다. 괴로움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 슬픔을 비롯하여 비통, 절망 등이 있다. 이를 정신적 고뇌라 해야 할 것이다. 육체적 고통을 당해도 슬프다. 그래서일까 고성제에서는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S56.11)라고 했다. 이와 같은 정형구는 십이연기에서도 보인다.

 

슬픔과 관련된 복합어가 있다. 이를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나사-우빠사야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라고 한다. 슬픔(soka), 비탄(parideva), 고통(dukkha), 근심(domanassa), 절망(ūpāyāsā) 이렇게 다섯 개 단어가 합해진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우비고뇌(憂悲苦惱)라 할 것이다. 이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괴로움이 총망라된 것이다. 마치 괴로움 5종세트를 보는 것 같다.

 

세상에 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있었다. 아소까대왕을 말한다. 전인도를 통일하고 담마에 의한 정복(Dhammavijaya)’을 천명한 전륜왕을 말한다. 그런 아소까대왕을 무우왕이라고도 한다. 아소까라는 말은 슬픔을 뜻하는 소까(soka)에 부정접두어 아(a)가 붙어서 아소까(asoka)가 되는데 이 말은슬픔없음이 된다. 이를 한자어로 무우(無憂)라고 한다. 근심없는 왕이라는 뜻이다.

 

슬픔없는, 근심없는 아소까대왕은 정말 슬픔과 근심이 없었을까? 말년에는 슬픈 아소까가 되었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모든 땅을 정복하여

십억 금을 보시하고 행복한 자라도

최후에는 반 아말라까를

자유롭게 얻을 뿐이다.

 

몸에 공덕이 다하면

그 슬픔을 여읜 왕도

죽음에 당면하여

마침내 슬픔에 이른 것이다.(Vism.8.14)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아소까대왕은 전인도를 승가에 보시했다. 그리고 대신을 시켜서 다시 사들였다. 이는 고대인도에서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아소까대왕은 세 번 이렇게 했다. 그러나 말년에 왕궁에 유폐되었다.

 

유폐된 아소까대왕은 승가에 진귀한 보물을 공양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신들의 만류로 할 수 없었다. 오로지 하나, 식사 시간에 얻은 아말라까 열매 하나를 보시할 수 있었다.

 

아말라까 열매는 승원에 보내졌다. 승가대중들은 그 아말라까를 끈으로 묶어 국을 끓여 먹었다. 또 승가대중은 아말라까를 꺼내어 탑을 세우고 탑 속에 모셨다고 한다.

 

천하를 통치하고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했던 아소까대왕의 말년은 슬픈 아소까가 되었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슬픔을 여읜 왕도 슬픔에 이른 것이다. (asoko sokamāgato)”라고 했다.

 

시인은 늘 슬픔을 노래한다. 시인은 괴로움을 노래한 것이다. 괴로움을 괴롭다 하지 않고 슬프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슬프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슬퍼하지만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본래 세상은 슬픈 곳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모른다.

 

슬픔을 노래하는 사람은 슬픔없는 곳으로 가고자 할 것이다. 그곳은 어디일까? 아마도 천상일 것이다. 지상에서 슬프게 보냈다면 천상에서는 기쁨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천상에서는 오로지 기쁨과 행복만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 천상의 존재가 있다. 그는 영원히 천상에서만 살지 않는다. 복과 수명이 다하면 아래 세계로 떨어진다. 그래서 천상의 존재는 죽음이 올 때 몇 가지 징조가 있다. 이는 그의 화환이 시들고, 그의 의복이 바래고, 그의 겨드랑이에서 땀이 흐르고, 그의 몸이 추악해지고, 자신의 하늘보좌에 더 이상 기뻐하지 않는다.(It.7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죽기 7일전부터 이런 조짐이 보인다고 한다.

 

천상의 존재는 오로지 기쁨과 행복만을 누릴 뿐 복을 지을 기회가 없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 떨어질지 알 수 없다.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이왕 떨어질 것이라면 인간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이여, 인간의 상태가 천신들이 좋은 곳이라고 일컫는 것이다.”(It.77)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만큼 깨달음을 얻기 위한 조건이 없음을 말한다.

 

천상에 태어나면 인간의 경우와는 달리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수 없다. 그런데 정법이 살아 있는 시대에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이는 그러므로 인간으로 있으면서 여래가 가르친 세 가지 배움의 가르침과 안내의 역할로서의 계율에 대해서 들으면, 믿음이 생겨난다. 믿음이 이 가르침과 계율안에서 가르쳐진 바에 따라 실천되면 현세와 내세에서의 최상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ItA.II.78-79)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해탈과 열반이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데 있어서는 인간만큼 좋은 조건이 없다. 항상 기쁨과 행복만 있는 천상과 다르고, 항상 괴로움만 있는 악처와는 다르다. 행불행이 교차하고 희로애락이 있기 때문에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좋은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괴롭다고 하여, 슬프다고 하여 천상에 나고자 한다.

 

천상의 존재들은 기쁨과 행복만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복과 수명이 다하여 아래 세계에 떨어지려 하는 동료에게 천신이여, 또 거듭해서 오시오.”라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세계에 내려 간다면 그곳에서 공덕을 쌓아서 다시 돌아오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천상의 하루는 인간의 백년 보다 훨씬 더 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십삼천(Tusita)은 인간으로 따지면 36백만년을 산다. 그래서 잠시 한 두시간 자리를 비우듯이 인간계에서 살다가 다시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인연담이 있다.

 

 

하늘아들 말라바린이 ‘오늘 아침부터 당신이 안보이던데, 어디 갔다 왔소?’라고 물었다. ‘여보, 저는 죽었습니다.’ ‘무슨 소리요?’ ‘주인님, 사실입니다.’ ‘어디서 태어났소?’ ‘싸밧티 시의 한가문에 태어났습니다.’‘얼마나 그곳에서 오랫동안 지냈습니까?’ ‘주인님, 열달만에 저는 어머니의 태에서 나와 열여섯 살에 다른 가문에 시집가서 네 아들을 낳아 기르며, 수행승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시중을 들며 다시 돌아오기를 서원하여 당신 곁에 온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은 얼마나 됩니까?’‘주인님, 백년입니다.’‘그렇게 짧습니까?’ ‘주인님,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 태어나서 산다면, 시간을 빈둥거리며 방일하게 보냅니까?’ ‘주인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인간들은 늙음과 죽음이 없이 무수한 세월을 사는 것처럼 방일합니다.’ "

 

(법구경 48번 게송 인연담, Patipujikavatthu-빠띠뿌지까와 관련된 이야기)

 

 

인간의 백년은 천상에서 잠시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잠시 마실 다녀온 것처럼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다시 천상에 복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마치 천년만년 살것처럼 세월을 허비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천상의 수명에 비하면 인간의 수명은 하루살이 보다 더 짧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방일하게 보낸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천상병 시인은 천상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인간세상에 있었던 것에 대하여 잠시 소풍 나온 것으로 노래했다. 그런 인간세상은 슬픈 곳이다. 그래서 시인은 본래 고향인 천상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인지 모른다.

 

 

2021-01-1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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