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청산과 백운의 정암사 수마노탑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12. 08:20

청산과 백운의 정암사 수마노탑에서


요즘 뉴스를 보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피한다. 회피에도 한계가 있다. 어제 우연히 연합뉴스 채널을 잠시 보게 되었다. 자막에 해외여행 갈 돈으로 자동차 구입이라는 문구가 눈에 띠었다.

해외여행 다니는 것이 일상처럼 된 사람들이 있다. 비교적 여유 있는 계층의 사람들은 철마다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휴때나 명절 때 사상최대 인파가 공항을 빠져나갔다는 뉴스를 종종 접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해외여행에는 빈부와 귀천이 따로 없는 것 같다. 코로나 이전에는 너도나도 밖으로 나갔다. 이런 경향에 나도 예외가 아니다. 일년에 한번은 성지순례 명목으로 밖에 나가길 바라는 발원을 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아니라면 작년에도 올해도 나갔을 것이다. 주로 불교성지가 있는 아시아국가이기 쉽다. 절이 있는 곳이면 성지이고 불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성지가 된다. 혹시 올해 코로나가 종결된다면 내년에는 해외 성지에 있을지 모른다.

대통령은 4프로 성장을 얘기했다. 저성장시대에 놀라운 수치를 제시한 것이다. 이렇게 전망하는 것은 코로나와 관련이 있다. 코로나가 물러나면 보복적 소비가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미 보복적 소비는 일어나고 있다. 비교적 여유계층에서는 해외여행 못간 것을 국내에서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판매가 늘어나고 국내여행이 활성화 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낙수(落水效果)’라고 볼 수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해외에서 소비했기 때문에 부자들에 의한 낙수효과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중산층일까? 재산으로 따진다면 중산층이 아니다. 요즘 말하는 중산층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재산도 그렇고 타고 다니는 차도 그렇다. 그래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만큼은 중산층이다. 이렇게 글을 쓰며 사유하는 것도 선진국 기준으로 본다면 중산층 조건에 들어갈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 써 놓은 글을 책으로 엮어 놓으면 부자가 된 듯하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중산층은 아니지만 중산층처럼 살려고 노력한다. 해외여행도 다니고 국내여행도 다닌다. 그러나 여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기록으로 남긴다. 해외 성지를 많이 가보지는 않았지만 가는 곳마다 후기를 남겼다. 블로그에 사진과 동영상을 곁들여 남겨 놓았다.

이번 5월 어버이날에 12일 강원도 여행을 갔다. 정선 가리왕산 자연휴양림 통나무집에서 하루 밤을 잤다. 이른 아침 해 뜨는 모습을 보고서 자연의 경이를 느꼈다. 이제 막 신록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산천초목은 연두빛이었다. 연두빛 세상이 경이로 다가왔다.

연두빛 세상에 대한 경이는 정암사 순례에서도 이어졌다. 수마노탑에서 내려다 본 정암사는 자연에 푹 파묻혀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그래서인지 청명한 하늘에는 흰구름이 빠른 속도로 흘러 갔다. 그러나 산하대지는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연두빛 세상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꼈다. 정중동이고 동시에 동중정의 세상이었다.

 


대자연을 접하면 감동이 일어난다. 그것은 일상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을 간다. 삶이 무료하고 권태로울 때는 변화를 주어야 한다. 아마 여행만큼 설레이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정암사 수마노탑에서 본 자연은 경이로웠다. 어떻게 보면 자연이 큰 선물을 준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오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인 불교성지를 참배하러 온 것에 대한 보상이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이로만 끝나서는 안된다. 감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좀처럼 감동 있는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 단지 즐기기 위한 여행이라면 경이에 그치고 말 것이다.

경이는 기쁨이기도 하다. 자연에서 경이를 느끼고 유적에서도 경이를 보는 것은 기쁨이다. 단지 놀랍다는 정도에 그치고 만다. 경이에서 감동으로 이어지는 않는다. 눈물날 정도로 감흥이 나지 않음을 말한다. 대개 보는 것으로 끝나 버린다. 보고 나서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다.

정암사 수마노탑에서 자연과 인공의 경이를 보았다. 그런 한편 무상을 보았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인지 흰구름이 푸른 창공에서 빠른 속도로 흘러 갔다. 선가에서 말하는 백운과 청산이 연상되었다.

백운은 무상을 상징한다. 끊임없이 형태를 달리하는 흰구름을 보고서 무상을 지각한다. 청산은 경이를 주지만 무상을 지각하게 해 주지 못한다. 물론 푸른 산이 단풍이 들면 계절무상은 있을 수 있다.

 


히말라야 설산을 보면 경이가 일어날 것이다. 만일 저 산에서 화산이 폭발한다면 어떤 생각이 일어 갈까? 아마 경이로움은 두려움으로 바뀔 것이다. 태풍, 지진, 쓰나미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를 느꼈을 때 경이를 넘어 두려움이 일어난다.

두려움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현실에서 발생한다. 두려움은 자연의 역동적 현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서 나도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때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죽음만큼 두려운 것이 없다.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두려움에 떨 것이다. 특히 잘 사는 사람들이 그렇다. 천상락을 사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불청객 같은 것이고 불쾌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누구 하나 예외없이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살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보는 천신(天神)들도 그랬다.

천신들은 수명이 보장되어 있다. 그런데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신이라도 복과 수명이 다하면 어느 세계로 윤회할지 알 수 없다.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끝날 날이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천신들도 윤회하는 증생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천신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내가 죽다니!” 또는 내가 죽어야만 한다니!”라며 두려움에 떨 것이다. 그래서 “벗이여,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상주하지 않는 것을 상주한다고 여겼다.” (S22.78)라며 두려움이 일어난 것이다.

부처님은 무상에 대한 가르침만 설하지 않았다. 동시에 고와 무아에 대한 가르침도 설했다. 만일 부처님이 무상만 설했다면 염세주의자로 몰렸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부처님 법이 전승되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은 무상과 함께 고와 무아도 설했다. 이 세 가지는 항상 함께 한다. 왜 그런가? 현상이 생멸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온이 생멸하는 것이다. 그것도 찰나생찰나멸이다.

천신들에게도 무상에 대한 지각이 일어났다. 이어서 무아에 대한 지각도 생겨났다 그래서 천신들은 벗이여, 우리들은 실로 영원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 (S22.78)라고 했다. 이와 같은 무아의 지각이 일어 났을 때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라고 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여기서 두려움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죽음의 극복에 대한 가르침도 설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이라고 말한다. 이를 한단어로 말한다면 상베가라 할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상베가는 외경으로 번역된다. 두려움과 경이로움이라는 뜻이다. 물론 자연에서도 외경이 있을 수 있다.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불가항력적 상태가 된다면 죽음에 대한 두여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 자연은 경이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외경의 대상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감동으로 이어지기 힘들다. 숭고함은 있을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수학적 숭고함과 역학적 숭고함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외경에 있다. 이는 감동이 있는 가르침을 말한다. 처음 가르침을 접하면 두려움을 갖는다. 죽는다는 사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죽음의 극복에 대한 가르침이다.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상베가(sa
vega)’이다. 종교적 감흥을 말한다.

 


정암사 수마노탑에서 경이를 보았다. 청산은 가만 있는데 백운은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마치 동영상을 보는 것처럼 속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무상에 대한 것이다. 자연무상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부처님은 오온의 생멸에 대해 설했다. 지금 여기에서 오온의 생멸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에서 무상과 고와 무아를 보라고 했다. 그러나 자연에서는 무상을 볼 수 있지만 고와 무아를 볼 수 없다.

자연의 변화에서 무상을 감지한다. 그러나 자연무상에서 고와 무아를 볼 수 없다. 다만 자연무상을 보는 그 마음은 관찰할 수 있다. 그 마음은 느낌에 대한 것으로 생멸한다. 그래서 느낌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다름아닌 불교적 지혜에 해당된다.

불교적 지혜는 무상, , 무아를 아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동시적이다. 왜 그런가? 찰나생찰나멸이기 때문이다. 생과 멸만 있을 뿐 거의 머물지 않는다. 일어났다가 바로 사라진다. 일어나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사라지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로 사라진다. 그래서 머물지 않고 사라진다. 생멸이기 때문에 무상, , 무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무상, , 무아이기도 하다.

오온은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라서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고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했을 때 초심자는 오해 하기 쉽다. 찬나가 그랬다.

찬나는 부처님 마부출신이다. 부처님의 유성출가를 도왔다. 그래서일까 아상으로 가득했다. 이런 찬나는 기피대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공부가 늦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서야 공부를 했다. 장로들은 마치 초심자 같은 찬나에게 처음부터 일체개고를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벗이여, 찬나여, 물질도 무상하고 느낌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고 형성도 무상하고 의식도 무상합니다. 물질도 실체가 없고 느낌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실체가 없습니다.” (S22.90)


장로들은 찬나에게 일체개고만 빼고 무상과 무아만 알려 주었다. 이렇게 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주석에 따르면 왜냐하면 괴로움의 특징이 시설 되면 이와 같이 이 수행승은 물질도 괴롭고 의식도 괴롭고 길()도 괴롭고 경지(果位)도 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Srp.II.318)라고 했다.

일체개고를 잘못 이해하면 염세주의자가 되기 쉽다. 도와 과도 괴로운 것이 되어 버리게 될 것이다. 심지어 책상도 괴롭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괴로움이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통의 괴로움, 형성의 괴로움, 변화의 괴로움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것이 세 가지 괴로움이다.” (S45.165)라고 했다. 이른바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괴로움의 특징은 아라한이 되어서나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찬나에게 가르침을 준 장로들은 아라한이었을 것이다.

 


대자연에서 경이를 본다. 정암사 수마노탑에서도 대자연의 경이를 보았다. 연두빛 청산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백운은 무상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대자연에서 괴로움과 실체없음을 보기는 힘들다.

자연무상에서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인생무상도 마찬가지이다. 오온무상에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지금 이순간 찰나생찰나멸하는 현상에서 무상, , 무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무상과 인생무상은 자아에 기반한 것이다. 자아를 가지고 있는 한 불교적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무아이어야 깨달을 수 있다. 오온을 관찰해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깨달았다고 볼 수 있다. 무아의 깨달음을 말한다.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한다. 오온이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때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이 일어난다고 했다. 자연의 경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자연에서 감동이 있기는 하지만 볼 때뿐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불사의 감동은 불변일 것이다. 죽음의 극복에 대한 감동만큼 더한 감동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안다면 매일매일 감동의 나날이 되지 않을까?


2021-05-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