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스님을 비판하면 안되는 것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14. 07:37

스님을 비판하면 안되는 것일까?


나는 지식인일까? 한번도 지식인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지식인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에치디(Ph.D)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강단에 선 적도 없다. 언론사 기자도 아니고 시나 소설을 쓰는 작가도 아니다. 그럼에도 지식인에 준하는 조건은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유하는 존재임을 말한다. 왜 그런가? 글은 논리이기 때문이다. 논리가 서 있지 않으면 횡설수설하기 쉽다. 마치 술취한 자가 했던 얘기 또 하는 식이 되기 쉽다. 무엇을 사유하는가? 끊임없이 묻는다. 자신과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런 것이 글로 표출된다.

식자우환이라고 한다. 조금 아는 것이 문제가 된다. 알량한 지식으로 아는 채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본다면 같잖게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쓴다. 이것저것 따지고 상황 고려하면 쓸 것이 없다. 블로거의 의무적 글쓰기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비켜가지 않는다.

며칠전 글을 하나 썼다. 스님에 대한 글이다. 민감한 주제를 거론했다. “스님들은 하루 한끼 드시라!”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충격을 준 것 같다. 발끈한 스님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 반응이 있었다. 가장 많은 들은 말은 너는 그렇게 하고 있느냐?”라는 식의 말이었다. 것이 많았다. 무엇을 말하자는 것일까? 한마디로 너나 잘해!”라는 말로 인식되었다. 스님 하는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것이다.

글의 파장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하루 한끼만 드시라고 한 것에 상처받은 스님들이 많은 것 같다. 부처님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테라와다 스님들은 실천하고 있음을 알렸다. 또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종단 권력승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 스님들이 발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동류의식으로 본다. 초록은 동색인 것이다.

스님을 비판하면 안되는 것일까? 권승들의 행태를 보고서 하루 한끼만 드시라고 했다. 탁발전통이 사라진 한국불교에서 율장정신만이라도 지키자는 의미에서 하루 한끼만 드시라고 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후에는 먹지 말자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스님들이 발끈한 것은 먹는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가지는 재가불자가 감히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불교에서 출가와 재가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거의 상명하복 관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와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스님이 하는 말에 토를 달아서도 안되고 스님 하는 일에 참견해서도 안되는 것 같다. 스님의 역할이 있고 재가자의 역할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님에게 허물이 보여도 못 본 척하고, 스님의 허물을 들어도 못들은 척한다. 스님에게 허물이 있어도 언젠가 잘못을 참회하고 초심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스님을 허물을 말하지 말고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는 대승보살계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절 집안에서는 스님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허물이 있다. 당연히 스님들도 허물이 있다. 계를 지키지 않는 허물이 크다. 그런데 수행자의 허물은 작은 것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런 허물을 누군가 지적해 주어야 한다. 보름에 한번 포살법회가 있다면 서로 허물을 지적하고 참회의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계율대로 살지 않는 한국불교에서 포살법회 하는 곳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러 다보니 스님들이 잘못을 해도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

가장 좋은 것은 스님이 스님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님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다. 남 하는 일에 관심 갖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비상식이 상식이 되어 버렸다.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여 비법이 일상이 되었다. 권승들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도 권승들의 행태를 지적하지 않는다. 스님들이 지적해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아마 불이익 받기 때문일 것이다. 스님들이 못하면 지식인들이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들도 침묵한다. 왜 그럴까? 불이익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종단과 관련된 사람들은 지적할 수 없는 것 같다. 스님의 허물을 보아도 못 본 척하고,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것이다. 누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종단과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 결국 불교활동가들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불교지식인이 아니라 불교활동가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불교활동가가 된 것은 아니다. 블로그에 글을 쓰다 보니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 재가불교단체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불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른바 종단개혁운동을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글을 남겼다. 실제로 현장에서 뛰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모두 기록해 둔 것이다. 이를 재가불교활동가는 어떻게 사는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기도 했다. 물론 문구점에서 낸 것이다. 문구점에 인쇄와 제본 의뢰한 것이다. 보관용으로 딱 두 권 만들었다. 피디에프(pdf)로도 만들었다.

한국불교 미래에 대해 수백개 달하는 글을 썼다. 주로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를 말한다. 왜 경전을 근거로 하는가? 경전에서 본 부처님 가르침과 현실에서 본 권승들의 행태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경전을 근거로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비난과 비판은 다른 것이다. 근거 없이 비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근거가 있는 비판은 장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스님이나 종단에 대한 글쓰기를 하면 비난으로 보는 것 같다. 아마도 동류의식이 작용한 것 같다. 권승들의 행태를 비판 했음에도 스님 전체를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번에 쓴 스님들은 하루 한끼 드시라!”라는 구호도 동류의식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비난이 아닌 비판을 해야 한다. 건전한 비판은 장려되어야 한다. 그래서 경전을 근거로한 비판적 글쓰기를 계속 해왔다. 이를 한 블로거의 외침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뀐 것은 없다.

2016
년 광화문에서의 촛불은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이른바 적폐청산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에 있지만 상당히 바뀐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개혁의 무풍지대가 있다. 종교계를 말한다. 그것도 불교계는 미동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그들 만의 리그를 더욱더 공고히 하고 있다. 불교계에서 개혁과 적폐청산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힘 없는 자에게 무기가 있다. 그것은 입이다. 철옹성 같은 그들 만의 리그를 부수는데 있어서 입 만한 것이 없다.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불교활동가들이 목소리를 내는 이유가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스님들은 하루 한끼 드시라!”라며 일갈하는 것이다. 힘 없는 자가 힘 있는 자들에게 외치는 것이다.

스님에 대한 글을 쓰면 견제 받는다. 설령 권승들에 대한 외침이라 하더라도 너나 잘해!”라는 식으로 말한다. 특히 가르침을 근거로 스님을 비판하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대승보살계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승보살계 중에 대계 열 가지가 있다. 여섯 번째 항목을 보면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라는 조항이 있다. 이 조항에 근거하면 스님이 잘못 했어도 지적해서도 안되고 비판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나 빠알리 율장에서 이런 말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계율이라는 것은 시대에 맞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현시대에서는 현시대에 맞는 계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만들어진 케케묵은 듯한 소소한 계율은 폐기되어도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율장의 성립에 대한 것이다.

 

율장은 수범수제(隨犯隨制)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행승이 죄를 지으면 계율이 만들어지는 형식을 말한다. 오늘날 법이 만들어지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율장을 보면 사람들은 그들에 대하여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했다.”라는 정형구가 수 없이 나온다. 이처럼 사람들의 적극적인 비난이 있었기 때문에 율장이 성립된 것이다.

 

시대에 맞게 새로운 청규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옛날에 만들어진 율장을 폐기해서는 안된다. 설령 그것이 소소한 것일지라도 부처님이 판단한 것이다. 그 시대 상황에 대한 것이라도 오늘날 비추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취사선택하려 한다면 스님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율장은 사람들의 적극적 비난이 있었기 때문에 성립되었다. 그 결과 방대한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번뇌의 숫자만큼이나 계율이 많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계율이 훨씬 더 많음을 말한다. 만일 지금 부처님이 지금 이 땅에 계시다면 아마도 틀림없이 수행승은 스마트폰을 갖지 말라. 수행승이 스마트폰을 가지면 악작죄가 된다.”라고 말씀했을 것이다.

계율은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 청규라는 형식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동료 수행승이나 재가불자나 일반사람들이 혐책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청규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만들다 보면 밑도 끝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번뇌의 숫자만큼 계율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했다.

 

번뇌의 숫자만큼 많은 계율을 무한청정적 계율(apariyantapārisuddhisīla)’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초기경전 도처에서는 사소한 행위에서도 두려움을 보라고 했다. 계율을 따로 만들어 지키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지키는 삶을 말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청정한 삶이다. 또한 무소유의 삶을 말한다.

 

“믿음으로 출가한 총명한 행자라면,

삿된 구함에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생활을 정화해야 한다.(Vism.1.122)

 


청정한 삶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탁발 만한 것이 없다. 빌어먹는 삶이야 말로 가장 부처님 법답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 남방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지금까지 탁발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을 말한다.

한국불교에서 탁발의 전통은 실종되었다. 그 결과 부처님 가르침에서 먼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스님들에게 하루 한끼 드시라!”라며 일갈했다. 탁발하지 못하면 율장정신만이라도 지켜 달라는 취지에서 한 말이다. 그럼에도 반발이 크다. 아마도 먹는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람들에게 하루 세 끼 먹고 사는 것이야 말로 큰 일 중의 큰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도 비판하지 않는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죽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권승들의 행태에 침묵한다면 불교는 죽었다고 볼 수 있다.

비법이 득세함에도 이를 스님들이 지적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직무유기하는 것과 같다. 마하깟싸빠 존자는 부처님 사후에 비법이 득세할 것을 예견하고 다음과 같이 결집을 주도했다.


벗들이여, 우리는 가르침과 계율을 결집합시다. 예전에 가르침이 아니었던 것이 번영하고 가르침이었던 것은 쇠퇴하고, 예전에 계율이 아니었던 것이 번영하고 계율이었던 것은 쇠퇴하고, 예전에 가르침이 아니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강해지고 가르침이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약해지고, 예전에 계율이 아니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강해지고 계율이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약해집니다.”(Vin.II.285)


스님이 하지 못한다면 재가불자라도 해야 한다. 지식인이 비판하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왠일인지 불교지식인들도 침묵한다. 남은 것은 재가불교활동가들 뿐이다. 종단과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기 때문에 비판할 수 있다. “스님들은 하루 한끼 드시라!”라고.


그것에 대하여 그대들은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이와 같이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D1)


2021-05-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