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떠나는 여행

즐기는 삶에 바쁜 게으른 자는

담마다사 이병욱 2021. 7. 20. 09:41
즐기는 삶에 바쁜 게으른 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가 있다. 사업자등록증도 자신의 이름이 아니다. 통장도 자신의 이름이 아니다. 사업을 하다 망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되었을 때 파산신청을 하게 된다. 자신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를 경제적으로는 이미 사망한 자라 할 수 있다.

경제적 사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골반골절로 인하여 누워지내게 되었을 때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반와상 또는 완전와상 상태가 되었을 때 사회활동을 할 수 없다. 이를 사회적 사망이라 해야 할 것이다.

여기 치매환자가 있다. 방금 말한 것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은 기억할 지 모른다. 유년시절 기억같은 것이다. 그러나 동물적 본능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은 사유하지 못한다. 언어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만 번뇌가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면 정신적으로는 이미 사망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숨 쉬고 있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자,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는 이미 죽은 자이다. 과연 이런 사람들만 이미 죽은 자에 해당될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가 있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하는 자는 이미 죽은 자라고 볼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에게도 일이 있다. 먹는 것에 있어서는 부지런하다. 먹는 것을 즐기는 자이다. 늘 식사시간이 기다려진다. 하루일과중에 가장 큰 행사는 밥 먹는 일이다.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이 세상에 먹는 재미가 없다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때가 되어 출출할 때 삶의 활력이 솟을 것이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일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산다. 욕망대로 본능대로 감정대로 사는 자들이다. 한마디로 동물적 삶이다.

사람들 대부분 동물적 삶을 산다. 대부분 탐욕, 분노, 미혹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중생이라고 한다. 인간도 중생이고 동물도 중생이다. 더 확장해서 태생, 난생, 습생, 화생의 사생을 중생이라고 한다.

중생의 조건이 있다. 탐욕으로 살면 중생이고, 분노로 살면 증생이고, 미혹으로 살면 중생이다. 중생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탐, 무진, 무치의 삶을 살면 된다. 지혜롭게 살면 동물적 삶, 중생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함을 말한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하여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적 지혜이다.

지혜로운 자는 늘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한다. 마치 제3자처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탐욕과 성냄과 미혹이 일어날 수 없다. 무탐, 무진, 무치의 상태가 되었을 때 더 이상 죽지 않는 불사가 된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기에 바쁘다. 어리석은 자는 먹고 마시고 즐기기에 바쁘다. 지혜로운 자는 무탐, 무진, 무치의 상태이기 때문에 무아가 된다. 무아의 성자는 죽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는 탐욕, 분노, 미혹으로 살기 때문에 자아가 있다. 자아가 있는 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숨을 쉬고 있다고 해서 살아 있는 자가 아니다. 경제적 사망자도 있고, 사회적 사망자도 있고, 정신적 사망자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도 사망자와 같다. 오로지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재미로 산다면 이미 죽은 자와 같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보아 즐기는 삶에 바쁜 게으른 자는 이미 죽은 자이다.

2021-07-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