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명성이 악인을 죽인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5. 08:37

명성이 악인을 죽인다


벼슬도 싫다마는 명예도 싫어~” 아버지가 즐겨 부르던 노래 가사 중의 일부이다. 어렸을 적 아버지는 막걸리를 거나 하게 마시고 '물방아 도는 내력'을 불렀다. 50년대 히트한 노래이다. 삶이 고달파서 불렀던 것 같다.

벼슬과 명예, 남자라면 누구나 비라는 것이다. 여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식욕, 성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여기에 더하여 안락욕과 명예욕과 권력욕이 추가된다. 나는 과연 지킬 명예가 있을까?

서민에게는 명예도 권력도 없다. 그럼에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자존심은 지켜져야 한다.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밟히면 발끈한다. 밟히고 또 밟혔을 때 돈도 명예도 권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너무나 멀리 있다. 막걸리 한잔 마시고 현실을 잊고자 하는 것이다.

명예가 생겨나면 권력과 이득이 따른다. 또한 명예가 있으면 칭송도 있다. 학위를 받으면 미래가 보장되는 것과 다름없다. 요즘은 피에치(Ph.D)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각종 국가고시에 합격해도 명예는 물론 이익과 칭송도 보장된다. 사람들은 명예를 위해 올인하는 삶을 살게 된다.

명예는 꼬리표에도 달려 있다. 꼬리표가 길수록 명예도 올라가는 것 같다. 각종 학력과 경력이 이를 말해준다. 특히 선거에 나가는 사람의 꼬리표가 길다. 명예와 권력은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의 꼬리표는 짧다. 쓸만한 것이 없다. 회사를 여러 번 옮긴 것을 써야 할까? 대기업 다녔던 것도 내세울 만한 경력이 될까? 모임이나 단체에서 소임 보았던 것도 경력에 해당될까? 여러모로 나는 명예로운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명예와 인격은 어떤 관계일까?

유명하다고 하여 다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마치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모두 다 양서는 아닌 것과 같다. 반짝인다고 해서 금이 아닌 것과 같다. 명예가 있다고 해서 모두 다 인격자가 아니다.

지위를 자아와 동일시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의 호칭을 불러 주었을 때 그렇게 인식하는 것 같다. 장군이 되면 예우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장군에 걸 맞는 명예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퇴직하고 나서도 그 지위가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현직에 있었을 때 가장 높게 올라간 호칭을 붙여 준다.

그는 더이상 국회의원이 아니다. 그럼에도 의원님이라고 부른다. 장군출신은 당연히 장군님이라고 할 것이다. 교수로 정년퇴임했다면 교수님이 된다. 그러나 요즘 교수는 넘쳐 나는 것 같다. 너도나도 교수라고 말한다. 학원에서 강의해도 교수라고 하는 것 같다. 박사가 없어도 강단에 서면 교수라고 하는 것 같다.

교수 인플레이션시대이다. 너도나도 교수라고 하니 교수가치가 하락되었다. 누가 진짜 교수인지 알 수 없다. 이럴 때 명예교수가 등장한다. 교수도 명예가 있는 것이다.

교수도 차별화된다. 교수도 단계가 있는 것이다. 강단에 섰다고 다 같은 교수가 아님을 말한다. 전임강사도 있고, 부교수도 있고, 정교수도 있다. 여기에 석좌교수도 있다. 더 나아가 명예교수도 있다.

교수라는 직책은 명예로운 것 같다. 정년퇴임 후에도 명예라는 칭호를 붙여 주기 때문이다. 명예교수가 되면 교수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교수라고 해서 모두 박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박사아닌 교수도 많다. 그렇다면 우리사회에서 박사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유튜브에서 들은 것이 있다. 박사호칭은 실업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다. 학위는 있지만 직위가 없을 때 예우차원에서 그렇게 불러 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박사호칭은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다. 옛날에는 명예로운 것이었으나 인플레이션 되었을 때 그다지 명예스러운 것이 아닌 것이 된다. 마치 양반호칭과도 같다.

요즘 양반아닌 사람 없다. 누구나 양반이다. 너도나도 양반일 때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아마 야 이 양반아라는 소리 들을 것이다. 너도나도 박사일 때 어떨까? 아마 김박사” “이박사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요즘 박사호칭은 실업자와 동의어가 된 듯하다. 박사가 많다 보니 직위가 없는 경우가 많다. 박사라 하여 다 교수가 아니고 박사라 하여 다 연구원이 아닌 것이다. 실업자 박사도 많다. 그럼에도 힉위를 따는 노고를 존중해서 박사라고 호칭해 주지만 그것이 실업자를 의미한다면 명예로운 것은 아니다.

박사이면서 교수이면 최상이다. 이런 경우 박사보다 교수이다. 직함이 더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년퇴임 하고 나서도 교수님소리 듣고자 하는 것 같다. 이번에는 명예교수가 된다.

그 사람 명함에는 명예교수가 인쇄되어 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것 같다. 지켜야할 명예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에게 선생님이라고 말하면 실례일 것이다. 교직원과 차별화되길 바랄 것이다. 교수와 교직원은 다른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명예는 세속적인 것이다. 출세간에서는 명예가 있을 수 없다. 출세간에서 명예를 바란다면 자만이다. 자만은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족쇄에 해당된다.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은 대개 우월적 자만이기 쉽다.

세 가지 자만이 있다. 태생의 자만, 배운자의 자만, 부자의 자만을 말한다. 태생적 자만은 성직자에게서 볼 수 있다. 스님도 해당된다. 배움의 자만은 교수와 연구원 등 지식이 있는 자에게서 볼 수 있다. 부자의 자만은 많은 것을 소유한 자에게서 볼 수 있다. 드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누군데라며 은연중에 내비친다. 때로 내가 누군데 감히!”라며 노골적으로 자만을 드러낸다.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자에게서 볼 수 있다.

자만은 망하는 지름길이다. 자만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떠날 것이다. 그가 명예에 집착한다면 파멸에 이를 수 있다. 명예를 추구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권력과 권위를 갖고자 한다. 또한 명예는 항상 이득과 칭송과 함께 한다.

사람들은 명예와 이득과 칭송을 추구한다. 이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따른다. 이른바 세속팔풍(世俗八風)이라 하여 이익과 불이익,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행복과 불행의 삶을 살아간다. 출세간의 도를 지향하는 자라면 세속팔풍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이득과 명예, 칭송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은 두렵고 자극적이고 거친 것으로 멍에를 여읜 위없는 안온을 얻는 데 장애가 된다.”(S17.1)라고 했다. 그럼에도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바라는 삶을 살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어부가 미끼를 단 낚싯바늘을 깊은 연못에 던지면 눈을 가진 어떤 물고기가 그것을 삼키는 것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부의 낚싯바늘을 삼킨 물고기는 불행에 빠지고 재난에 빠져서 어부가 원하는 대로 이끌리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여기서 어부라는 것은 악마 빠삐만을 의미한다. 수행승들이여, 낚싯바늘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의미한다.”(S17.2)


이익과 명예와 칭송의 삶을 살면 악마의 낚싯바늘을 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출세간의 가르침이긴 하지만 세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왜 그런가? 이익이 있으면 손실이 있고, 칭찬이 있으면 비난이 있고, 명예가 있으면 불명예가 있고,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명예를 추구한다. 이 말은 이득과 칭송을 추구한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더 나아가 권력과 권위를 추구한다. 명예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될까? 자만에 빠질 것이다. 마치 악마의 낚싯바늘을 문 것과 같다. 악마가 하자는대로 할 것이다.

나는 명예가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세울 만한 것이 없다. 전직이 없는 것이다. 법조인처럼 전관예우도 없고 명예교수처럼 전직예우도 없다. 잡초같은 인생이다. 그럼에도 넘버원 블로거라고 자만한다면 악마의 낚싯바늘을 문 것과 같다.


파초와 대나무와 갈대는
자신의 열매가 자신을 죽이네.
수태가 노새를 죽이듯,
명성이 악인을 죽이네.”(S17.35)


2021-08-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