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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권 담마의 거울 2011 I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6. 18:01

28권 담마의 거울 2011 I

 

 

책을 편집하다가 시선이 한곳에 오래 머물렀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쓴 담마에 대한 글이다. 여실지견(如實智見)에 대한 것이다.

 

오래 전에 써 놓은 글을 읽어 보았다. 내가 쓴 글임에도 내가 쓴 것 같지가 않다. 지금 읽어 보아도 알차고 의미가 있다. 전혀 새롭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 남의 글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직 체화(體化)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당시 써 놓은 글은 청정도론을 근거로 해서 쓴 것이다. 한창 청정도론 읽는 맛이 있어서 글로서 옮겨 놓지 않으면 배기지 못할 정도로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었을 때이다. 그러나 이론만 알았을 뿐 수행은 뒤따르지 않았다. 아마 이런 것 때문에 글이 생소해 보였을 것이다.

 

10년 전에 써 놓은 글을 보니

 

예전에 써 놓은 글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행선에 대한 것이다. 그때 당시 표를 여러 개 작성했다. 나름대로 표로 요약한 것이다. 이런 공부방식은 엔지니어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엔지니어는 데이터로 말하라고 했다. 입으로만 말하면 마우스엔지니어라는 소리듣기 쉽다. 전자제품을 개발할 때는 데이터를 근거로 하여 표를 작성한다. 이런 버릇이 있어서 청정도론 공부할 때 표를 많이 만들었다. 10년만에 표를 보니 여실견과 여실지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주수행방법으로서 경행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전 2011년이면 수행에 대하여 잘 모르던 시기이다. 한창 글쓰기에 재미 붙여 경전과 주석을 근거로 하여 오로지 글만 쓰던 시기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수행과 관련된 글을 남겼다.

 

10년전에 작성한 표를 보면 분명히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제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제2단계인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에 대하여 주수행방법으로서 경행이라고 되어 있다.

 

표를 보니 있는 그대로 봄을 뜻하는 여실견(如實見)에 대해서는 견청정이라고 하였고 정신과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의 지혜를 뜻하는 여실지(如實智)에 대해서는 의심을 극복함의 청정이라고 했고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라고 했다. 이런 분류 방식은 청정도론에 그대로 있다,

 

행선이 좌선보다 더 효과적인 이유는?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제1단계와 제2단계 지혜는 좌선보다 행선이 더 효과적이다. 이는 많은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에서도 발견된다.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서는 좌선과 행선은 동등할지 몰라도, 2단계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에 이르면 행선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왜 그런가? 행선에서는 의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우 쿤달라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서는 다음과 같이 행선이 좌선보다 더 효과적인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 ‘, 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이다.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으면 수행자는 두 단계 이상의 지혜를 뛰어넘게 된다. 돌려는 의도를 안다는 것은 정신적 현상을 아는 것이고, 몸이 도는 것을 안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을 아는 것이다. 이제 수행자는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을 구별할 수 있다. 이것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이다.

 

수행자가 몸을 뒤로 도는 것은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 돌려는 의도는 원인이고 몸이 도는 것은 결과이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다, 그러므로 의도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112)

 

 

우 쿤달라 사야도는 마하시사야도의 직제자 중의 한사람이다. 미얀마 땃담마란띠(Saddhammaransi) 국제선원 창시자이다. 또 미얀마 담마마마까 국제선원 선원장인 우 에인다까 사야도의 스승이기도 하다.

 

우 쿤달라 사야도의 책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을 접한지는 10년이 넘었다. 이제까지 읽어 본 수행지침서 중에 최상이다. 10년 전부터 읽고 또 읽는다. 그래도 늘 새로운 것은 체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 쿤달라 사야도에 따르면 위빠사나 제2단계 지혜를 증득하는데 있어서 행선을 들고 있다. 물론 좌선으로도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행선을 예로 든 것은 다름 아닌 의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멈추어 서 있다가 뒤로 되돌았을 때 의도가 있다. 그래서 의도는 원인이 되고 도는 행위는 결과가 된다. 이렇게 행선을 함으로 인하여 제1단계와 제2단계 지혜를 한꺼번에 알 수 있다. 아마 이것이 행선이 좌선보다 더 효과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 공식수행지침서에서도

 

현재 한국테라와다불교 이사장 빤냐완따 스님도 행선의 이익에 대하여 강조했다. 스님은 틈만 나면 행선의 장점에 대해서 법문으로 글로 표현한다. 최근 글에서는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라고 했다.

 

스님이 행선을 강조한 것은 실제로 미얀마에서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이켜보면, 이승은 출가 초기부터 좌선수행보다는 걷는수행을 많이 해온 편입니다. 좌선보다는 주로 걷는수행을 통해 삼매의 근력을 길렀고, 걷는수행을 통해 더 많은 법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3)라고 했다.

 

깊은 삼매를 계발하는데 있어서 좌선은 매우 유용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고요한 숲으로 들어가서 선정을 닦으라고 했다. 그러나 좌선만으로는 완전한 삼매와 통찰지혜를 계발할 수 없다.

 

부처님은 행주좌와와 어묵동정간에도 항상 깨어 있을 것을 강조했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이라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A3.16)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빤냐완따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좌선만으로는 부동의 삼매를 계발할 수 없습니다. 좌선만으로만 얻어진 삼매는 온실의 화초 같아서 햇빛을 받으면(밖으로 나가면) 이내 시들어 버립니다. 여지없이 깨져 버립니다. 그러나걷는 수행(행선)’을 통해 얻은 삼매를 바탕으로 한 좌선삼매는 강력한 힘을 지닙니다. 좌선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계속 강한 삼매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29)

 

 

빤냐완따 스님이 위와 같이 언급한 것은 경과 주석을 근거로 한 것이다. 경에서는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A5.29)라고 했다. 주석에서는경행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Mrp.III.236)라고 했다.

 

최근 수행에 관한 서적을 다시 읽고 있다. 특히 빤냐완따 스님이 정리한 수행지침서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면밀하게 읽고 있다. 마하시 수행방법을 기본으로 하여 한국수행자들에게 적합하도록 편집한 한국테라와다불교 공식수행지침서이다.

 

일상에서 깨달음의 기연(機緣)

 

어느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에서나 좌선, 행선, 일상선, 이렇게 세 가지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생활선도 좌선이나 행선 못지 않게 중요함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빤냐완따 스님은 일상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해 놓았다.

 

 

예로부터 많은 수행자들이 일상의 행위 속에서 진리의 본성을 깨달아 번뇌를 소멸했다. 새벽별을 바라보다가, 몸을 눕히는 순간, 밭을 갈다가, 새벽닭 우는 소리에, 가을날 홍시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종소리를 듣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순간적으로 진리의 본성을 깨닫는 예를 경전이나 주석서 어록 등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길, 55-56)

 

 

깨달음의 기연(機緣)에 대한 것이다. 어떤 계기가 되어 통찰지가 일어남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연은 일상생활선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일상에서 알아차림이 매우 중요함을 말한다.

 

수행처에서는 일상선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우 쿤달라 사야도는 책에서 수행초기에는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일상의 알아차림을 할 수 있게 되면 수행에 큰 진전을 보게 된다.”(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105)라고 했다. 이는 아마도 깨달음의 기연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일상에서 어떻게 알아차림 해야 할까?

 

일상에서는 좌선과 달리 움직이는 모든 것이 수행의 대상이 된다. 경전에서는 몸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이라 하여 먹고 마시고 소화시키고 맛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차림을 갖추고”(D22.6)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일상선은 아침 일어날 때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기까지 모든 과정이 알아차림의 대상이 된다. 구체적으로 이부자리 정리, 양치, 세면, 식사준비, 음식먹기, 물마시기, 문열기, 걸어가기, 기다리기, 버스에 올라타기, 카드대기, 손잡이 잡기, 앉기, 계획하기, 글쓰기, 보고하기등 갖가지가 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가 수행대상이 되는 것이다.

 

일상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알아차림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우 쿤달라 사야도는 분명한 앎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일상의 알아차림”(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106)이라고 했다. 일상에서도 분명한 앎, 즉 삼빠자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분명한 앎에 대하여 주석서에서는 유용성에 대한 분명한 앎, 적합성에 대한 분명한 앎, 감각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 어리석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Pps.I.253)으로 설명되어 있다.

 

일상에서도 좌선이나 행선 못지않게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나 빠른 움직임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운전할 때나 이야기할 때가 그렇다. 이럴 경우 전체 상황을 개괄적으로 알아차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길, 59)이라고 했다.

 

수행자에게 첫번째 통찰지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이렇게 물으면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초기불교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특히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칠청정과 위빠사나 16단계 지혜로 설명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제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이다. 정신과 물질이 하나가 아니라 둘로 구분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 몸은 마음은 정신과 물질로 되어 있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첫번째 통찰지이다.

 

수행자에게 첫번째 통찰지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우 조티카 사야도는 수행자가 이 통찰에 이르지 못한다면 발전할 희망이 없습니다.”(마음의 지도, 136)라고 했다. 위빠사나 첫번째 지혜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가 생겨나지 않으면 수행의 진척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놀랍게도 똑 같은 말을 10년 전에 써 놓은 글에서도 발견했다.

 

10년전에 쓴 글에서는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경전 한구절을 인용했다. 이는 암소 비유의 경’(A9.35)이다. 경에서는 암소가 산을 타는 것에 능숙하지 못한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은 능숙하지 않음을 말한다. 수행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한다고 앉아 있어 보지만 한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이라면 암소가 산을 타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10년 전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이 비유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한 마디로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자’는 수행을 하여도 효과가 없다는 말이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칠청정과 16단계 지혜를 얻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이 정신-물질과 원인-결과를 아는 것인데 이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면 그 다음 단계로 가 보았자 실패할 것이고 헤메일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은 나가 없고, 초월적 존재도 없고 창조주도 없고 오로지 물질-정신, 원인-결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부터 수행은 출발된다고 하는 강력한 메세지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신-물질, 원인-결과를 어떻게 아는 것일까.”(여실견(如實見) 여실지(如實智), 2011-07-09)

 

 

10년 전의 글에서도 정신-물질과 원인-결과를 아는 1단계와 2단계 지혜에 대하여 언급했다. 이에 대하여 행선으로 실행가능한 것이라 했는데 경행이야말로 ‘위대한 수행’이라고 한다.”라고 써 놓았다.

 

10년 전의 글을 읽어 보니 오늘날 읽어 보아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는 경전과 주석을 근거로 하여 썼기 때문이다. 만일 나 자신의 견해에 대하여 써 놓았다면 빗나갔을 것이다. 10년전의 글이나 지금이나 행선의 중요성은 변함이 없다. 위빠사나 제1단계와 제2단계 지혜는 행선이 매우 유익함을 말한다. 그래서 위대한 행선이라는 표현을 했다.

 

행선이야말로 위대한 수행

 

행선이 왜 위대한 수행일까? 이는 우 쿤달라 사야도가 경행을 하면서 알아차림이 잘 되면 좌선수행에 큰 진전을 보게 된다. 경행이 잘 되면 일상의 알아차림도 쉬워진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109)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위빠사나 수행 첫번째 통찰과 두 번째 통찰이 일어나기까지 행선이 매우 유익함을 말한다. 이 중에서도 첫번째 통찰이 결정적이다.

 

어느 수행지침서에서든지 공통적으로 다룬 것은 첫번째 통찰에서 성품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우 조티카 사야도는 나마루빠의 고유한 성품과 소로 다른 본성을 보면 에 대한 견해가 정립되고 잘못된 앎이 정리됩니다. 그 이상은 아닙니다. , 영혼, 존재에 대한 그릇된 견해가 정리되는 것이 견해의 청정입니다.”(마음의 지도, 137)라고 말했다.

 

우 조티카 사야도는 행선이나 좌선을 해서 정신과 물질의 성품을 보면 유신견이 타파된다고 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까지 나라고 여겨 왔던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것 만한 통찰이 어디 있을까?

 

넘어져서 깨달은 경우도

 

위빠사나 첫번째 통찰은 매우 중요하다. 행선이나 좌선을 하여 첫번째 통찰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다음이 진행이 되지 않는 것이 때문이다. 수행에 진척이 없는 것은 결국 성품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품은 어느 날 갑자기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새벽별을 바라보다가, 몸을 눕히는 순간, 밭을 갈다가, 새벽닭 우는 소리에, 가을날 홍시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종소리를 듣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등으로 순간적으로 진리의 본성을 깨닫는 것으로 설명된다.

 

깨달음의 기연과 관련하여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 게송이 있다. 테라가타에서 쌉빠다싸 장로는 “그때 나는 삭도를 들고 침상이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목의 정맥을 자르기 위해 삭도를 가져다 그 곳에 대었다.(Thag.408)라고 했다.

삭도로 자결하기 위해 칼을 목에 대는 순간 깨달은 것이다.

 

정사로 걸어 가다 넘어져서 깨달은 경우도 있다. 바구장로는 “혼침에 정복되어 나는 정사를 나왔다. 경행처로 올라가다 거기서 땅에 넘어졌다.(Thag.271)라고 했다. 넘어진 순간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Thag.409)라고 했다.

 

탁발하다가 땅바닥에 넘어져셔 깨달은 경우도 있다. 담마장로니는 “탁발을 다니다가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없이 흔들리는 팔다리로 땅바닥에 넘어졌는데, 몸에 일어난 그 재난을 보자 나의 마음은 해탈되었다.(Thig.17)라고 했다.

 

실재에 대한 알아차림 했을 때

 

깨달음의 기연은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다만 알을 품고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도 늘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있을 때 어느 순간 기연으로 인하여 통찰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빤냐완따 스님의 기연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좌선을 마치고 <걷는수행>을 하기 위해 눈을 드려는 의도와 함께 눈을 뜨는 순간 또 한 번 이상한 현상이 목격되었습니다. 명상홀 10m 전방쯤에 걸려 있는 벽시계가 눈에 들어오는 왔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그 시계는 이 승이 늘상 보아오던 그 시계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계는 찰라지간 퍼즐 조각처럼 맞추어지면서 시계의 모양이 되었고, 시간을 인식하는 과정 역시 순간적으로 부품조립 과정을 거치면서 로봇이 완성되는 것과 같았고, 부분 부분 촬영된 슬라이드 사진을 한 컷 한 컷 보는 것과 같이 초침 분침 시침이 분리된 채 각각 순차적으로 시각인식 되면서 시간의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63-64)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사띠와 삼빠자나가 함께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일은 일상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하여 분명한 앎(삼빠자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네 가지 근본이 되는 분명한 앎에서 네 번째인 어리석지 않은 분명한 앎에 해당된다고 본다. 이를 주석에서는 실재에 대한 알아차림(asammohasampajañña)’이라고 설명한다.

 

실재에 대한 알아차림이란 무엇일까? 이는 행동의 배후에 주체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로 설명된다. 그래서 우 쿤달라 사야도는 오온에는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만 존재한다. 세간에서 말하는 라는 것은 하나의 용어에 불과하다. ‘또는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107)라고 했다.

 

빤냐완따 스님이 체험한 기연은 개념의 해체로 본다. 마치 잠에서 깨었는데 여기가 어딘지 햇갈리는 것과 같다. 한달 전에 이런 경험이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자다 깼는데 한동안 멍해 있었다. 앞이 보이긴 하는데 여기가 어딘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는 마음만 있었다. 앞에 보이는 것이 있어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몰랐다. 그러다가 몇 초 지나자 알게 되었다. 개념화가 진행된 것이다. 깨달음의 기연도 이런 것 아닐까?

 

위빠사나 초보자에게 깨달음의 기연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청정도론을 보고서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2단계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를 표로 정리해 두었다. 지금 읽어도 잘 정리가 된 듯하다. 두 지혜는 각각 칠청정에서 견청정과 의심극복청정에 대응된다. 이들 지혜는 행선이 주수행방법이라는 것도 써 놓았다. 이런 사실도 변함없는 것 같다.

 

좌선과 행선을 하고 일상에서 사띠와 분명한 앎을 놓치지 않았을 때 깨달음의 기연이 찾아올지 모른다. 그것은 새벽별을 바라보다가, 몸을 눕히는 순간, 밭을 갈다가, 새벽닭 우는 소리에, 가을날 홍시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종소리를 듣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등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초보자에게 깨달음의 기연은 첫번째 통찰지, 즉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아닐까?

 

 

실제로는 명()과 색() 뿐이다.

여기에 뭇삶(衆生)도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들어진 꼭두각시처럼, 이것은 텅 빈 것()이다.

괴로움의 다발일 뿐, 풀과 나뭇등걸 같다.”(Vism.18.31)

 

한 쌍의 명색은

양자가 서로 의지해 있다.

하나가 파괴되면,

양자의 조건들이 파괴된다.”(Vism.32)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이 있을 때,

뭇삶이란 통칭이 있을 뿐이다.”(S5.10)

 

28권 담마의 거울 2011 I.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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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