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들기

29권 담마의 거울 2011 II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12. 09:20

29권 담마의 거울 2011 II

 

 

아침에 눈을 뜨니 또 하루가 시작된다. 하루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아침인가 싶으면 저녁이다. 월요일인가 싶으면 금요일이다. 새해인가 싶었는데 이제 8월이다. 반절이 지났으니 더 빨리 지나갈 것이다.

요즘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다. 나이는 단지 카운트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숫자에 불과한 나이를 한살 더 먹는 것이 두렵다. 이렇게 먹다 보면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을 때가 올 것이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날이 언제 인지 알 수 없다. 십년후일까? 이십년후일까? 기대수명대로 사는 것일까? 그러나 모두 기대일 뿐이다. 오늘밤 최후를 맞을 수도 있다. 아니 한시간 후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은 자는 움직임이 없다. 자신의 힘으로 손가락 하나 까닥 할 수 없을 때 죽은 것과 다름없다. 눈을 뜰 힘조차 없을 때 틀린 것이다. 누구나 이런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고 우주가 무너지는 듯할 것이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

 

눈 뜰 힘조차 없고 손가락 하나 까닥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무슨 생각이 들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속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이렇게 눈 뜰 힘도 없으니 억울하고 분한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움직임이다. 움직임이 있다면 살아 있는 것이다. 마치 그가 죽은 자처럼 움직임이 없다면 죽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죽음은 반드시 육체적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져서 파산했다면 그는 경제적으로 사망한 상태나 다름없다. 그가 나이 들어 엉덩이 골절상을 당해 누워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 간다면 사회적으로 사망한 상태나 다름없다.

 

자신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루종일 누워서만 지내는 와상환자라면 사회적으로 사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움직임이 있어야 살아 있는 것이다. 활동을 해야만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왕년 유명가수가 콘서트를 여는 것은 자신이 건재함을 과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살아 있다.”라고 알리는 것과 같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살아 있음을 알게 된다.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 하루 어떤 드라마가 펼쳐질지 알 수 없다. 내가 하기 나름이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날이지만 변화가 있다면 잘 산 것이다. 오늘이 어제와 다르고, 내일이 오늘과 다르다면 매일매일 새로운 삶이다.

 

보통불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매일매일 글 쓰는 재미로 살아 간다. 매일매일 새로운 삶이다. 보통불자의 일생은 하루를 주기로 돌아 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 탄생이다. 저녁에 눈을 감으면 죽음이다. 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매일 죽는다.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한 것은 글쓰기이다. 보통불자에게 있어서 글쓰기야말로 삶의 전부와도 같다.

 

책을 내기 위하여 과거에 쓴 글을 소환하여 편집작업했다. 2011년 하반기에 쓴 담마에 대한 글이다. 블로그에 교학과 교리에 대한 별도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저장해 놓았는데 20119월부터 12월까지 쓴 글로서 모두 27개의 글이다. B5(JIS)크기의 종이에 11폰트 사이즈로 했을 때 472페이지에 달한다.

 

29권 담마의 거울 2011 II.pdf
2.66MB

지금으로부터 10년전 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지금과 다를 바 없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부리나케 사무실로 달려가 오전일과를 글쓰기로 시작한다. 그런 글이 쌓이고 쌓여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요즘은 책으로 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책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썼던 것을 시기별로 카테고리별로 모아 놓으면 그만이다. 여기에 목차를 달고 서문을 쓴다. 책처럼 보이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서문을 쓰면 마치 화룡점정(畵龍點睛)하는 것 같다.

 

10년전에 쓴 나의 글은 어땠을까? 불교 교리와 교학과 관련된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대한 것이 많다. 마치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열리는 것 같았다. 이런 진리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제 아무리 똑똑한 자라도 인식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자신의 우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접했을 때 우물 밖에 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이 일시에 해소되는 것 같았다. 특히 죽음에 대한 것이 그랬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서는 인간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과 자연과 우주에 대해서 의문해 보지만 답이 나오지 않을 때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접하면 시간 모를 정도로 빠져 들 것이다. 특히 죽음의 순간과 탄생의 순간에 대해 묘사한 바왕가 이론을 보면 불교 교학의 진수를 보는 것 같다.

 

나의 인생은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보는 순간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의 삶은 불교 교리와 교학에 탐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에 니까야도 접했다. 현재 번역되어 있는 두 종류의 니까야를 모두 다 갖추었다. 글을 쓸 때 마다 열어 본다. 경전과 주석을 근거로 할 때 사는 맛을 느낀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글로 남았다.

 

사람의 일생을 탄생과 죽음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매순간 탄생이다. 이는 부처님이 상윳따니까야 세상의 생겨남의 경’(S35.107)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나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S35.107)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생겨남은 여섯 감각 영역에 대한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시각의식이 생겨나는데 이를 세상의 생겨남이라고 보는 것이다. 청각도 후각도 미각도 촉각도 마찬가지이다. 매 순간 감각을 인식했을 때 세상의 생겨남으로 보는 것이다.

 

생겨나는 것이 있으면 사라지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생겨나는 것만 있고 사라지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태어나면 죽음이 있기 마련이듯이, 세상도 생겨나면 소멸되기 마련이다. 이는 부서지는 것이므로 세상이라고 한다.”(S35.82)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지금 눈을 떠서 대상을 보고 있는데 소리가 들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청각이라는 세상이 열린다. 동시에 시각이라는 세상은 소멸한다. 매순간 우주가 생겨났다가 소멸하는 것이다. 물론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이와 같은 세상을 상카라로까(sakhāraloka)라고 한다. 이를 형성계 또는 조건계라고 한다.

 

상카라로까는 이 몸과 마음에서 생멸하는 세상을 말한다. 내가 있어서 세상이 있는 것이지 세상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눈을 감으면 세상이 무너지고 내가 눈을 뜨면 세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카라로까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하나의 세상이 있어 일체의 뭇삶은 자양으로 산다. 두 세상이 있어 정신과 물질이다. 세 세상이 있어 세 가지 느낌이다. 네 세상이 있어 네 가지 자양이다. 다섯 세상이 있어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다. 여섯 세상이 있어 여섯 가지 내적 감역이다. 일곱 세상이 있어 일곱 가지 의식의 주처이다. 여덟 세상이 있어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이다. 아홉 세상이 있어 아홉 가지 뭇삶의 거처이다. 열 세상이 있어 열 가지 세계이다. 열여덟 세상이 있어 열여덟 가지 인식의 세계이다.”(Vism.7.38)

 

 

매일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된다. 오늘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인생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런 세상은 즐거운 것이 아니다. 매순간 새로운 우주가 열리지만 근본적으로 괴로운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다. 시각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렸을 때 이에 대하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35.107)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매순간 발생되는 세상은 괴로운 것이다. 결국 절망으로 귀결된다. 왜 그런가? 세상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가만 있을 수 없다.

 

무언가라도 해야 한다. 다행히 십년전부터 글쓰기를 해서 헛되이 보내지 않은 것 같다. 과거에 쓴 글이 이렇게 29번째 책 담마의 거울 2011 II’가 책으로 엮여져 나왔을 때 허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수행을 해야 한다. 나는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2021-08-12

담마다사 이병욱

 

'책만들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권 진흙속의연꽃 2011 II  (0) 2021.09.05
내가 책을 만드는 이유는  (0) 2021.08.21
27권 담마의 거울 2010 II  (0) 2021.08.07
28권 담마의 거울 2011 I  (0) 2021.08.06
하루하루 완전연소하는 삶을  (0) 2021.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