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내가 백만장자 부럽지 않은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0. 6. 08:03

내가 백만장자 부럽지 않은 것은

 


새벽 2시 반에 깼다. 너무 이른 시간이다. 서서 방안을 왔다갔다 하며 법구경 '마음의 품' 빠알리 게송을 암송했다. 갈증이 나서 보이차를 끓여 마셨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너무 일찍 일어나면 오후가 힘들다. 더 자기로 했다. 깊은 잠은 아니다. 잠재의식과 무의식이 활동하는 시간이다. 나의 의지와 통제를 벗어나는 마음의 시간이다. 꿈속에서 보내지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아름다운 꿈도 있지만 흉측한 꿈도 있다.

한때 꿈해석을 해 보기도 했지만 그만 두었다. 꿈은 꿈일 뿐이다. 초기경전에도 꿈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대신에 깨어 있으라는 얘기는 많다. 잠 들 때 깰 것을 염두에 두고 사띠하며 잠 들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꿈 꿀 틈이 없을 것이다.

인생을 잠만 자다 보낼 수 없다. 인생을 꿈만 꾸다가 보낼 순 없다. 이 세상에 태어 났으면 무언가 하나라도 이루어 내야 한다. 대부분 부자가 되고자 한다. 사람들은 돈 버는 재주가 없음에도 모두 돈 버는 선수가 되는 것 같다.

아무나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선수가 되었다는 것은 프로페셔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원하든 원치 않든 돈버는 선수로 살아 간다고 볼 수 있을 때 모두 프로라고 볼 수 있다. 그 중에 특별난 사람은 돈 버는 선수가 된다. 대게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번다. 부모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사고 팔기를 되풀이 하여 백만장자가 되는 것이다. 부동산 불패신화를 믿고 요지에 사 놓아서 시세차익을 챙기는 수법을 말한다. 이것은 다름아닌 불로소둑이다.

돈벌기가 선수가 되어 돈을 번 사람들 대부분은 불로소득자들일 것이다. 천문학적 돈을 번 것에는 편법, 탈법, 불법이 있기 마련이다. 떳떳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자랑하지 않는지 모른다.

에스엔에스에서는 자랑거리로 넘쳐난다. 페이스북을 보면 사소한 것에서부터 큰 것에까지 자랑질이 대부분이다. 먹방을 연상케하는 것이 가장 많다. 여행 간 것도 많다. 손주자랑도 빠지지 않는다. 대개 사진을 동반한다. 마치 인증샷하듯이 사진으로 말하는 것 같다.

지랑하는데 있어서 아직까지 집자랑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타고 다니는 자동차 이야기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왜 그럴까?

첫번째 이유는 위화감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에는 못사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페이스북은 많이 배운 사람이나 있는 사람들이 주로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제적 격차는 있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집자랑과 자동차 자랑하는 것은 마치 마누라자랑과 자식자랑하는 것처럼 못난 행위로 비추어지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두번째로 에스엔에스에서 집자랑과 자동차자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불로소득자로 낙인찍히기 때문일 것이다. 너른 평수에 살고 있는 것을 자랑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럽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그가 근면하게 노력해서 이마의 땀과 팔의 힘으로 이룩해 놓은 것이라면 창찬받아 마땅할 것이다.

아직까지 에스엔에스에서 자신의 집자랑과 자신의 자동차자랑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자랑하면서 집자랑과 차자랑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부끄럽고 창피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자들의 특장이 있다. 자꾸 감추고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남들 모르게 조용히 즐기는 삶을 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에스엔에스에서는 졸부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에스엔에스할 필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에스엔에스에서 사람들이 사소한 것 가지고 자랑질할 시간에 그들은 가난뱅이들이 맛 볼 수 없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을지 모른다.

불로소득은 부끄러운 것이다.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다. 불로소득은 창피한 것이다. 떳떳치 못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재산을 자꾸 숨기고 싶어 한다.

불로소득은 자랑할 수 없는 것이기에 가난한 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 해보았자 시기와 질투만 유발할 뿐이다. 그대신 그들은 그들과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 같은 지역에 살며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부자의 자만에 가득한 자가 자신의 부를 자랑질할 만한 이유가 없다. 그래서인지 에스엔에스에서는 집이나 자동차를 자랑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세상사람들은 부로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가 못났어도 가진 것이 많으면 잘난 자가 되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사는 집과 타고 다니는 자동차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이때 부의 형성과정은 묻지 않는다. 아파트를 사고팔기를 거듭하여 백만장자가 되었다면 그 부를 부러워한다. 동시에 불로소득에 의한 것이라고 경멸하기도 한다.

부자에게는 우월적 자만이 있다. 반면 가난한자에게는 열등적 자만이 있다. 우월도 자만이고 열등도 자만인 것이다. 그런데 동등도 자만이라는 것이다. 우월이 자만인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열등과 동등도 자만인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놀랍게도 디가니까야 33번 경을 “세 가지 교만 곧, 내가 우월하다는 교만, 내가 동등하다는 교만, 내가 열등하다는 교만이 있습니다.”(D33)라고 했다. 우월도 자만이고, 열등도 자만이고, 동등도 자만임을 알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자만이 있다. 부자의 자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이 배운자에게도 자만이 있다. 학위가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배운자의 자만이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박사인데"라며 박사학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은연중에 학위가 없는 자를 깔보는 경향이 있게 될 것이다.

배운자의 자만만 있을까? 태생의 자만도 있다. 이를 가문의 자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출신을 따지는 것도 태생적 자만이 된다. 요즘 태생적 자만은 지위가 될 것이다. 이를 지위의 자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성직자에게도 자만이 있다. 성직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태생적 자만을 갖기 쉽다. 마치 브라만 계급에 태어나 태생적 자만을 갖는 것과 같다. 스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님이 되었다는 것은 이전의 자신은 죽고 수행자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스님인데"라는 마음을 내기 쉽다. 신부도 목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만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남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나와 비교하여 나보다 못해 보이면 우월적 자만이 생겨난다. 나와 비교하여 나 보다 나아 보이면 열등적 자만이 생겨난다. 나와 비슷하면 동등적 자만이 생겨난다.

나를 남과 비교했을 때 우월적 자만, 열등적 자만, 동등적 자만이 생겨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숫따니빠따에서 "자기를 남과 비교하여 동등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Stn.799)라고 했다. 자만은 비교 때문에 발생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불행은 비교에서 발생한다. 아내가 남편을 돈 잘 버는 이웃집 남자와 비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불화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혼하게 될지 모른다. 아버지가 자식을 공부 잘 하는 이웃집 아이와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 아이는 열등감에 비뚤어질 수 있다.

모든 것을 비교하여 따지면 나의 자존은 낮아 진다. 왜 그런가? 이 세상에는 나보다 우월한 자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가 부동산투기로 50억짜리 불로소득 아파트를 가지고 있을 때 만족할까? 부동산투기로 60억 불로소득 올린 자와 비교하면 자존심 상하는 것이다. 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랜저를 타고 다니는 자가 에쿠스를 탄 자를 보면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그래서 더 큰 평수와 더 큰 차를 원한다. 비교하기 때문이다.

비교하면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제1의 부자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자존감이 낮아질 것이다. 비교하면 자존감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부를 비교하면 나의 자존은 낮아 진다. 그것이 부동산 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이었던 간에 천문학적인 부를 이룬 자와 비교하면 나의 자존감은 한없이 낮아진다. 남의 차와 비교해 보면 나는 초라해 보인다. 학위도 그렇고 지위도 그렇다. 모든 것을 나의 현위치에서 남과 비교했을 때 자존감은 낮아진다.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세상을 부와 학위와 태생으로 비교하면 나의 자존감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나의 자존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교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나뿐만 아니라 배우자나 자식을 남과 비교하는 것도 중단해야 한다.

비교하면 자존만 상하게 되어 있다. 자존감 없는 삶을 살게 되면 불행해진다. 그래서 부처님도 "자기를 남과 비교하여 동등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비교하지 말라는 것은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남과 비교하는 한 이 사회에서 결코 자존감 있는 삶을 살기 힘들다. 비교하면 최상층에 있는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자존이 상실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렇게 살 순 없다. 비교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인생의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다.

직장 다닐 때 매년 연말이 되면 사업계획서를 작성했다.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개발부서에서는 일을 할 때 개발계획서를 작성한다. 개발시작부터 완료 때까지 개발차트를 작성하여 날자별로 꼼꼼히 기록한다. 이럴진 데 인생계획서는 없는 것일까?

일인사업자로 살면서 사업계획서 따위는 작성하지 않는다. 홀로 일하는 자에게 의미 없는 것이다. 일 해서 부자가 되기를 포기했을 때 사업계획서는 의미 없다. 그 대신 인생계획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불교공부를 제대로 해보자는 것이다. 그 넓이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한 가르침의 바다에서 놀아 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그결과 불교계 최대 누적조회수를 가진 블로거가 되었다.

 


블로그에 올린 6천개가량의 글은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은 과거 써 놓은 글을 책으로 묶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34권 만들었다. 앞으로 100권 만들 것이다. 사람들에게 "책 한권은 아파트 한채 가치가 있다."라고 말한다. 돈이나 지위, 명예를 추구하기 보다는 불교공부 하는 것에 인생의 가치를 두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부자이다. 백만장자 부럽지 않다.

아파트와 자동차를 남과 비교하면 초라하다 못해 처량하다. 남들처럼 부동산투기 대열에 동참하지 못해서 이순이 넘도록 고작 스물세평 아파트와 경차를 타고 다닌다. 이런 현실을 남과 비교하면 하면 나의 자존은 한없이 낮아 진다. 그러나 비교를 중단하면 나의 자존은 회복된다. 글쓰기를 하여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면 나의 자존감은 살아난다.

사람들은 돈버는 재주가 없음에도 돈벌기 선수가 되어서 돈을 버는데 인생을 올인하고 있다. 인생을 돈에 목적을 둔다면 자존감이 결여된 삶을 살기 쉽다. 자존감 있는 삶을 살려면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도덕적인 삶과 봉사하는 삶을 살았을 때 나의 자존감은 고양된다. 나에게 자존감은 항상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하는 삶이다.

"쏘나여,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이든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물질을 두고 나는 우월하다고 여기고 나는 동등하다고 여기고 나는 열등하다고 여긴다면 누구든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자밖에 될 수 없지 않은가?”(S22.49)

2021-10-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