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천막배낭 지고 다니는 사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0. 13. 07:23

천막배낭 지고 다니는 사람


이 안락함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언젠가는 끝나고 말 것이다. 이 행복이 천년만년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인생이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아니 한시간 후에 어떤 일이 어떻게 터질지 알 수 없다.

안양아트센터 근처에서 그 사람을 보았다. 벌써 몇번째 보는지 모른다. 그것도 수년간에 걸쳐서 본다. 그 사람 모습은 여전하다. 천막배낭을 맨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지고 가는 듯하다.

 


그사람을 처음 본 것은 10년은 더 된 것 같다. 블로그에 그날 인상 깊었던 것을 기록해 둔다. 그를 포착한 것도 기록으로 남겼다. 벌써 몇번째인지 모른다. 한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보았을 때 관심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모습은 독특하다. 독특하기 때문에 눈에 띈다. 이상한 사람, 특별난 사람이 눈에 띄는 것과 같다. 노숙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도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겉으로 보아서는 정체를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안양에 산다는 것이다.

안양 곳곳에서 그를 본다. 한번은 안양예술공원 거리에서 보았다. 모양은 언제나 똑같다. 더벅머리에 등짐을 지고 있다. 등짐은 천막을 돌돌 말은 것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배낭이 아니다. 천막 말은 것에 어깨끈을 만들어 지고 다닌다.

그사람을 안양 곳곳에서 목격한다.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이다. 한번은 학의천 공원에서 그를 보았다. 겨울이었는데 양말을 신고 있지 않았다. 몹시 추운 날씨였는데 옷도 얇았다. 그는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누군가 불쌍하다고 사준 것이다.

그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 노숙자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도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만나서 얘기해 보고 싶다. 만나서 돈이라고 주고 싶다. 그러나 마음뿐이다. 용기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사람을 왜 못만나는 것일까? 용기없음이 가장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두려움도 크다. 혹시나 그사람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아는 체하는 사이가 되었을 때 서로 불편해할 것 같다는 것이다. 대단히 이기적 발상이다.

그사람은 그사람 나름대로 삶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그사람 삶에 개입하여 동정한다면 기분 나빠해할지 모른다. 내가 그사람에게 약간의 도움을 준다면 일시적으로 삶은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현재와 같은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한 밑빠진 독에 물붓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사람 삶의 방식에 개입할 이유가 없다. 그사람은 그사람만의 삶의 방식이 있다. 이상하게 보여도 그사람의 삶의 방식이다. 그사람이 불쌍하게 보이고 동정심을 유발하게 보일지라도 그사람의 방식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시작을 알수 없는 윤회에서 별일 다 겪어 보았을 것이다. 재벌로서 삶도 살았을 것이고, 걸인으로서 삶도 살았을 것이다. 행복하고 부유한 삶도 있었을 것이고, 불행하고 가난한 삶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그사람 삶의 방식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삶의 방식이 있듯이, 그사람은 그사람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다. 그 사람이 나보다 못살고 불행해 보인다고 해서 동정한다면 그사람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

그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또하나 이유는 부처님 가르침 때문이다. 불행하고 가난한 자를 대할 때는 동정과 연민도 좋지만 더 수승한 것은 그사람 입장이 되어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S15.11)라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 입장이 되었을 때 만난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결국 그사람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만나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가 너무 허름해 보이는 것도 이유가 있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심리가 작용해서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만나지 못한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대체 그사람을 만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만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블로그에 그사람에 대한 글을 종종 올린다. 목격한 것을 사진과 함께 느낌을 올리는 것이다. 그랬더니 어느날 공중파 방송 작가로부터 댓글을 받았다. 그사람 연락처를 알면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다 보면 종종 있는 일이다.

이번에도 그사람을 보았다. 일반사람이 보기에는 오래 못살 것 같은데 죽지 않고 나타난 것이다. 안락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노숙자가 아니라 도인일지 모른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학인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부터 따졌을 때 내 나이는 16세라고 했다. 그래서 스승이 될만한 사람이 있으면 찾아 뵙고 가르침을 청하고자 한다. 마치 선재동자차럼 스승을 찾아 다니는 것이다.

누가 인생의 스승일까? 엄밀히 말해서 스승 아닌자가 없다. 유튜브를 보면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는 명사들만 쫓아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명하다고 하여 다 훌륭한 사람일까?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다 양서일까?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다. 금인지 똥인지는 만나서 대화해 보면 알수 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하는 사람도 있다. 명사보다도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한다.

나는 용기없는 사람이다. 선재동자라고 하여 명사들만 찾아 다니려 하는 것이다. 불행하고 가난해 보이는 자들을 찾아 다녀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천막배낭을 지고 다니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 했다.

천막배낭 지고 다니는 사람과 또 마주칠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마주쳤으니 그도 나를 알아볼지 모른다. 다음에 마주칠 때 나는 말 걸 용기가 있을까? 말 건다면 어떤 대화를 해야 할까?

의문에 가득찬 인물을 동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가 동정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기분 나빠 해할지 모른다. 그럴 때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과연 천막배낭 진 사람과 대화할 수 있을까?

이 안락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의 건강도 최후에는 질병으로 끝나고, 일체의 젊음도 최후에는 늙음으로 끝나고, 일체의 목숨도 최후에는 죽음으로 끝난다. 일체 세상의 존재도 태어남에 따르고 늙음에 시달리고 질병에 정복되고 죽음에 공격받는다.”(Vism.8.14)"라고 했다.

내가 천막배낭 진 사람보다 잘 난 것은 없다.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한량없는 윤회에서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던 때가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사람을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명사만 쫓아다닐 일이 아니다.


2021-10-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