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에 올인해야
고래바위는 그대로 있다. 사위는 고요하다. 서울과 수도권 위성도시 숨막히는 곳에 비밀 아지트가 있다. 고래바위계곡이다.
또다시 고래바위계곡을 찾았다. 이번에도 돈까스를 준비했다. 이번에는 홍익돈까스이다. 점심시간 대목을 맞이하여 산마을 주막에는 줄을 섰다. 할수없이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홍익돈까스와 새로운 인연이다.
마치 소풍가는 것 같다. 이마트에서 김밥과 빵을 샀다. 내비산 산림욕장입구 가판대에서는 떡과 음료수를 샀다. 먹을 것은 충분하다. 이제 저 산 하나만 넘으면 우리계곡, 고래바위계곡이다.
산행이 목적인가 먹는 것이 목적인가? 먹을 것을 잔뜩 준비하다 보니 먹는 산행이 되어 버렸다.
세상에 먹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스님이나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점심공양에 대한 글을 올렸더니 어느 수행자가 글을 남겼다. 미얀마에서 오랫동안 수행한 재가불자 K선생이다.
"사두 사두 사두 _()_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스님께 공양을 올리는 일이 아주 중요하지요. 재가자가 공양을 올리지 않으면 스님들은 굶을수밖에 없기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걸식이든 청식이든 공양은 꼭 필요하고. 공양청은 그래서 엄청난 선과보를 가져다 준다고 합니다~~
자고로 먹고 사는 일은 시대와 상관없이 너무나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일은 시대와 상관없이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라한도 먹어야 산다. 매일 오전에 탁발나가는 것은 먹기위한 것으로 주요한 하루일과 중의 하나이다.
성자도 먹어야 산다. 범부도 먹어야 산다. 먹어야 사는데 있어서는 같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다. 범부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먹지만, 성자는 무탐, 무진, 무치로 먹는다.
먹는 모습 하나만 보아도 깨달았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젓가락 놀리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음을 말한다. 탐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냄이 가장 드러나기 쉽다. 그 다음이 탐욕이다. 어리석음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먹을 때 탐욕이 드러난다. 그 사람에게 탐욕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려면 함께 식사해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어떠할까?
여전히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맛있는 것을 탐하는 마음이 있는한 탐욕이 남아 있다. 음식에 대한 갈애가 남아 있는 한 깨달음은 요원하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음식의 적당량을 알라고 했다. 음식절제를 말한다.
먹는 것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여유 있는 자들은 먹는 시간이 기다려질 것이다. 다섯 시간만 지나면 허기지는데 이는 축복일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은 재앙에 가깝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먹어야 산다. 대개 먹는 것을 즐긴다. 그런데 아무리해도 만족이 없는 것은 세가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잠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곡주나 과일주 등 취기가 있는 것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성적인 교섭은 즐기더라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A3.104)
아무리해도 만족 없는 세가지 중의 하나는 취기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음주가 대표적이다. 흡연이나 마약 등 중독된 것도 포함된다. 이런 것들은 먹는 범주안에 들어간다. 그래서 아무리 먹어도 만족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해도 만족할 수 없는 세가지는 갈애에 대한 것이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만 나는 것과 같다. 갈애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갈애로 갈애를 극복할 수 없다. 갈애를 내려 놓음으로 인해 극복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가?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중립적인 느낌을 알아차리면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이론으로는 알고 있다. 실천이 문제이다. 이론과 실천의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느 순간에 도약한다. 이를 깨달음의 문지방을 넘었다고 말한다. 응축된 것이 어느 순간 터졌을 때 '문리가 터졌다'라고도 말한다. 어떤 이는 고원으로 설명한다.
사람은 왜 사는가? 향상심 때문에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 보다 더 나은 내일을 바라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만일 향상심 없이 산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죽지 못해서 산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정신적 성장을 바란다. 그러나 성장은 보이지 않는다. 매일 수련해 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포기하는지 모른다.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다고 한다. 수행을 한다고 하여 상승추세선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평행인 채로 있다. 그러다 어느날 도약한다. 이를 깨달음의 기연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글쓰기에도 단계가 있는 것 같다. 매일 서너시간씩 10년 이상 쓰다 보니 단계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잔잔하게 평행으로 가다가 어느 날 도약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깨달음도 그런 것일까?
깨달음의 기연에 대한 글을 썼다. 이에 대해 스님은 "이작가님!
시간에 차이는 있겠지만 분명히 시절인연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스님의 경험에 근거해서 격려의 말을 해 준 것이다. 정말 나에게도 깨달음의 기연은 있을까?
10년 이상 글을 매일 썼다.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모아 놓았다. 이번에는 책으로 묶는 작업을 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글쓰기에도 단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번 단계를 느꼈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위빠사나지혜 1단계도 넘지 못하고 있다. 정신-물질도 구별 못하는 단계이다. 노력 부족이다. 행선할 때 같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 무의미하고 무가치 보이는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문리가 터지듯이 어느 날 향상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힘들면 쉬어 가면 된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된다. 지금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멈추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불방일정진하라고 했을 것이다.
고래바위계곡은 숨겨진 비밀의 계곡이다. 내비산에서 산 하나만 넘으면 별유천지비인간이다. 요즘은 비행기도 지나가지 않는 것 같다. 완전한 고요이다. 이런 계곡을 음식먹는 것으로 더럽히는 것 같다. 여전히 탐욕으로 먹기 때문이다.
고래바위는 언제나 그자리에 있다. 앞으로 백년, 천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다. 나는 지난번에 왔을 때 보다도 얼마나 향상되었을까? 매년 수차례 찾아 오지만 큰변화는 없는 것 같다.
변화가 눈에 보인다면 누구든지 하지 못할 사람 없을 것이다. 어느 순간 도약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절인연이 있을 것이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에 올인해야 한다.
2021-10-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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