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도 타이밍
절에 가면 왜 얻어먹으려고 할까? 참으로 못된 생각 가진 것 같다. 이번에도 그랬다.
마하위하라에서 점심시간 때 일이다. 까티나법요식 1부 행사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있었다. 사원에는 공양간이 없다. 도시락도 없다. 한국불자들은 밖으로 나가서 먹어야 했다. 도로변 추어탕집이 점심식사 장소였다.
추어탕집에 자리잡았다. 다섯 테이블에 앉았다. 20명 가까이 된다. 청국장이 나왔다. 반찬은 푸짐했다. 밥보다 반찬이다. 그때 저쪽에서 계산이야기가 나왔다. 자신들이 내겠다는 것이다. 결국 둘이서 반분해서 냈다. 아마 각각 10만원가량 들었을 것이다.
식사를 하면서 왜 돈 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사원에서 식대를 낼 것으로 생각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절에 가면 공짜로 밥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절이든 사원이든 선원이든 신도들 보시로 운영된다. 스님들은 신도들의 보시에 의존해야 한다. 그럼에도 절에 가면 당연히 점심공양을 얻어먹는 것으로 알고 있다. 11월 7일 마하위하라 까티나축제 때도 그랬다.
절은 얻어먹는 대상이 아니다. 절은 보시해야 할 대상이다. 신도들이 절에 보시하지 않으면 스님들은 무엇으로 먹고 살까? 사원에서 밥을 보시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름다운 마음 냈다고 칭송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경전을 보면 정반대이다.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미래의 시기에
최후의 시대가 오면,
수행승들과 수행녀들의
행실이 이와 같으리라.”(Thag.977)
미래 최후시대가 있다고 한다. 어떤 시대일까? 주석에서는 승려들이 재산이 축적되었을 때 보시로서 베푸는 시대를 최후의 시대라고 했다.
최후시대는 불교가 껍데기만 남은 시대를 말한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가득 찬 자들이 승단을 점령했을 때 최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가르침과 계율의 오염이다. 그래서 "가르침 아닌 것을 가르침이라 설하고, 가르침을 가르침이 아닌 것이라고 설하고, 계율이 아닌 것을 계율이라 설하고, 계율을 계율이 아닌 것이라고 설하고,"(A10.37)라고 했다.
정법이 사라지고 비법이 득세하는 시대는 최후의 시대가 된다. 무엇이든 거꾸로가 된다. 이는 "여래가 말하지 않고 설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말하고 설한 것이라고 설하고,"(A10.37)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다.
비법이 득세하는 세상에서는 정법이 힘쓰지 못한다. 이런 한탄은 부처님 직제자 시절에도 있었던 것 같다. 풋사 장로는 "전지와 택지, 염소와 양, 남자노비와 여자노비를 미래에 어리석은 자들이 받아들이리라.”(Thag.957)라고 했다.
보시도 타이밍이다. 평소 보시하기를 즐기는 법우님 둘이 재빠르게 계산했다. 이런 사실은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 누가 밥값 냈는지는 알아야 한다. 박수로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까티나행사를 마치고 보시자중의 한사람을 카풀해 주었다. 방향이 같아서 함께 간 것이다. 차에서 법우님의 신행이야기를 들었다.
법우님은 이곳저곳 여러 곳에 통크게 보시를 하고 있다. 월급 받은 돈 대부분을 보시로 다 써버리는 것이다. 남들이 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법우님은 노동해서 돈을 벌고 있다. 홀로 힘겹게 살아간다. 법우님의 보시금액을 보면 월급의 절반은 되는 것 같다. 법우님은 엄청난 보시를 하고 있다. 왜 그런가? 능력껏 보시하기 때문이다.
월급 100만원 탄 자가 50만원 보시하면 50%가 된다. 한달 100억원 수입인 자가 1억원 보시하면 1%밖에 되지 않는다. 누가 더 보시를 많이 하는 것일까? 전자가 후자보다 50배 많다. 금액과 관련 없이 엄청난 보시를 하는 것이다.
법우님은 끼티나행사 때가 되면 이곳저곳에 가사보시를 한다. 한벌이 아니라 두 벌도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븟다데이 때도 이곳저곳에 보시한다. 이번에 식당에서 식사할 때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인생 살다 보면 남은 것은 무엇일까? 한평생 번 돈은 온데간데없다. 남에게 제대로 베풀고 산 적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감각만을 즐기는 삶을 살았다. 죽었을 때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금방 잊혀질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베풀고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베푼 행위 밖에 없다. 남에게 기쁨을 준 것밖에 남아 있지 않다. 과연 나는 남에게 기쁨을 주고 산 적이 얼마나 될까? 보시도 타이밍이다.
2021-11-0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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