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성직자 중에 하나를 택하라
카톨릭에는 세습이 없다. 사제들이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12세기 이전 유럽에서는 사제들도 결혼을 했었다고 한다. 유튜브 지식브런치에서 '중세유럽이 세습을 막은 방법'을 보고서 알았다.
한국교회는 대기업과 같다고 한다. 미국교회를 기업화 되었다고 하는데 한국교회는 여기서 더 나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자식에게 세습되는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중세 유럽에서도 그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여자를 택할것인가 성직자를 택할 것인가? 이 말은 성직자의 타락이 극에 달하던 시대에 던진 물음이었다고 한다. 성직자들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두었을 때 타락되었음을 말한다. 그것은 교회세습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교황청에서는 여자와 성직자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그 결과 12세기에 사제독신제를 채택했다고 한다.
오늘날 카톨릭성당은 세습되지 않는다. 사제독신제를 교회법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제는 평생 성행위를 하지 않고 산다. 순결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 보다 훨씬 더 이전에 독신주의를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스님이 되려면 성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성행위를 하면 왜 안될까? 탐욕을 부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자손을 갖게 하지 않는 목적도 있다. 성행위를 하면 자식이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생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생활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의미가 크다. 처자식을 굶기지 않고 먹여 살려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성직자가 결혼하면 처자식이 생겨난다. 처자식 때문에 성직에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성직의 타락이다. 성직을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식에게 세습 하려할 것이다.
한국 절에서는 세습을 보기 힘들다. 전통사찰의 경우 공찰이기 때문에 독신비구가 살다가 떠난다. 그러나 자식이 있는 승려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자식에게 물려주려 할 것이다. 일본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본 정토종 계열에서는 승려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룬다. 아
머리도 기르고 양복도 입는다. 그러다보니 절이 사유화되어서 자식에게 대물림된다. 오늘날 개신교와 유사한 형태이다. 이런 승려를 비구라고 할 수 있을까?
비구가 되려면 구족계를 받아야 한다. 이백가지가 넘는 비구계를 지켜야 한다. 그 중에 승단추방죄가 있다. 승단추방제 제1항은 불사음계에 대한 것이다. 비구가 되면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성적교섭을 가져서는 안됨을 말한다. 율장을 보면 심지어 원숭이와 관계를 해서도 안되고 죽은자와 해서도 안된다고 했다. 불사음계는 매우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고 전체 계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승려들은 왜 성적교섭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일까? 그것은 청정한 삶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탁발 등으로 무소유와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해탈과 열반을 이루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생 순결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순결한 삶에 대하여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고 한다.
브라흐마짜리야는 청정한 삶 또는 청정범행으로 번역된다. 브라흐마짜리야라는 말은 본래 바라문 사주기에서 학습기를 말한다. 불교에서 브라흐마짜리야는 학습기가 연장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비구가 되면 평생 순결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순결한 삶은 성적교섭없이 사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팔정도분석경에서 정업을 보면 “1)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고,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3)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행위라고 한다.”(S45.8) 라고 했다.
순결하지 못한 삶은 아브라흐마짜리야(abrahmacariyā veramaṇī)를 번역한 말이다. 청정한 삶을 뜻하는 브라흐마짜리야와 반대되는 말이다. 그런데 청정한 삶은 출가자와 재가자에게 다르게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출가자에게는 성적교섭의 금지에 대한 것이지만 재가자들에게는 불사음에 대한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스님이 욕설을 퍼부은 것이다. 재가자가 부인과 함께 사는 것을 맹비난한 것이다.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게 하는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한 것이다. 그 스님은 왜 그렇게 흥분했을까? 스님은 재가자의 삶에 대하여 시기하고 질투한 것일까? 비구계를 지키기나 하는 스님일까?
대구에 포교 잘 하기로 유명한 스님이 있다. 스님의 책에 '저거들은 맨날 고기만 묵고'라는 책이 있다. 재가자들의 삶에 대하여 매일 고기만 먹는 것으로 본 것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다. 재미 있게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쓴 것이다. 그런데 욕설 잘 하는 스님은 재가자들이 매일 고기만 먹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스님이 흥분한 것은 재가자가 아내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하여 맨날 성적교섭만 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스님의 욕설은 대단한 것이었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부부가 맨날 고기만 먹고 사는 것처럼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도 가정을 가져 보지 않았고 한번도 자식을 가져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한면만 보고 욕설을 퍼부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적교섭 없이도 살 수 있다. 그러나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재가자로 아내와 함께 살지만 순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다. 스님은 이런 점을 간과한 것 같다.
여자를 선택할 것인가 성직을 선택할 것인가? 이런 질문이 12세기 유럽 교회에서 있었다. 성직자는 두 개를 다 선택할 수 없다. 두 개를 다 선택하면 필연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있다. 결혼을 해서 자식이 생겨나면 교회를 물려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이와 유사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율장대품을 보면 귀공자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공자들이 기녀들을 데리고 숲속으로 놀러 갔다. 어느 공자가 기녀를 잃어버렸다. 기녀가 재물을 챙겨서 도망가버린 것이다. 이에 공자들은 기녀를 찾아 숲속 이곳저곳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가 숲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부처님을 발견했다. 공자들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여자를 보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공자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에게 어떠한 것이 더욱 훌륭한 일인가?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인가?”(Vin.I.23)
부처님은 여자를 찾지 말고 자기자신을 찾으라고 했다. 여기서 자기자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불교는 무아의 종교이다. 아뜨만을 뜻하는 자기자신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세상의 관례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여자를 찾지 말고 자기자신을 찾으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주석에서는 "자기자신은 등불에 비유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법구경 게송을 예로 들었다. 법구경에서는 "오, 어찌 웃고, 어찌 즐기는가? 언제나 세상은 불타고 있고, 그대들은 어둠에 덮여 있는데, 등불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Dhp146)라고 표현되어 있다.
자기자신은 자기자신을 밝히는 등불을 찾으라는 말과 같다. 초기경전에서 등불은 종종 부처님 가르침으로 비유된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 귀의문 정형구를 보면 "눈을 갖춘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들어 올리듯이,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등불은 무명을 밝혀 주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찾는 것은 무명의 등불을 찾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여덟 가지 무명의 어둠에 덮여 있는데, 어둠을 몰아낼 지혜의 등불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DhpA.III.103)라고 했다. 여기서 여덟 가지 무명은 무엇일까?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1) 부처님에 대한 의혹
2) 가르침에 대한 의혹
3) 참모임에 대한 의혹
4) 생성에 대한 의혹
5) 소멸에 대한 의혹
6)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혹
7) 연기에 대한 의혹
8) 조건으로 일어난 것들(연생)에 대한 의혹
(DhpA.III.78)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여덟 가지 의혹을 해소해야 할 것이다. 이는 여덟 가지 무명의 등불이다. 특히 수행자라면 여자를 찾기 보다는 자기자신을 먼저 찾아야 한다. 자기자신은 어떤 변치 않는 영혼과 같은 것이 아니라 무명의 등불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인가?”(Vin.I.23)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직자가 되려면 성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여자와 성적교섭을 가지면 필연적으로 자식이 생겨나게 되어 있다. 성직자 또는 수행자가 처자식을 부양할 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성직자가 가정을 꾸리면 타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세습으로 나타난다. 여자를 선택할 것인가 성직자를 선택할 것인가?
2021-11-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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