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부처의 출현과 정법(正法)의 변질

담마다사 이병욱 2021. 6. 5. 08:12

부처의 출현과 정법(正法)의 변질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부처가 출현한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봉축법문에서는 지혜와 자비라는 말과 함께 중생구제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이 오신 진정한 의미를 말하지는 않는 것 같다.

부처님은 왜 오셨을까? 이 말은 부처는 왜 출현했을까?”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블로거의 입장에서 최근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처가 출현한 것은 정법(正法: saddhamma)이 변질되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부처가 출현하여 정법이 유지되고 있다면 또 다른 부처가 출현할 수 없다. 왜 그런가? 과거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 내용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니다나상윳따(인연상윳따, S12)에서 볼 수 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 나라에 두 명의 왕이 있을 수 없다. 세상에 두 명의 부처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유일한 사람이 있다. 그 유일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다.”(A1.174)라고 했다. 이 세상에 두 번째의 부처님이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무이(無二)라고 한다. 따라서 두 개의 정법도 있을 수 없다.

 

부처가 출현한 것은 정법시대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과 같다. 이는 과거 부처가 출현했을 때 정법이 변질되어서 사라져 버렸음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느 봉축법회에서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느 스님도 이렇게 말한 것을 본 적이 없다.

 


누구도 부처가 출현한 이유에 대해서 속시원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니 부처가 출현한 이유에 대해 명백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정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 부처님들이 깨달은 정법이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변질되고 오염되어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럼 오늘날 불교는 어떠한가?

정법시대란 무엇일까? 부처님 가르침이 살아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구체적으로 사향사과와 열반이 있으면 정법시대인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고, 가르침에 따라 팔정도의 수행방법이 전승되어 오고, 팔정도 수행으로 사향사과와 열반이 있을 때 이를 정법시대라고 한다.

과거에 수많은 부처가 출현했다. 니까야에는 과거칠불만 기록되어 있다. 주석서에는 과거 25불까지 기록되어 있다. 금강경에서 볼 수 있는 연등불은 과거25불 중에서 최초에 해당된다. 빠알리어로는 디빵까라붓다라고 한다. 불자라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살로 살 때 연등불에게 수기를 받은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과거에도 수많은 부처가 출현했다. 이는 정법시대가 오래 가지 않음을 말한다. 그런데 미래에도 부처가 출현할 것이라고 한다. 멧떼이야붓다, 즉 미륵불을 말한다. 석가모니 정법이 이렇게 살아 있음에도 미래불의 출현을 예견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발견한 정법이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 조짐은 이미 오래 전에서부터 있어 왔다.

과거칠불 중에 정법기간이 짧은 부처님 시대가 있었다. 율장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싸리뿟따여, 세존이신 비빳씬과 세존이신 씨킨과 세존이신 벳싸부께서는 제자들에게 상세하게 가르침을 설하는데 피곤을 몰랐다. 그들에게는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이 거의 없었다. 제자들에게는 학습계율이 시설되지 않았고, 의무계율도 부과되지 않았다.”(Vin.III.8)


율장비구계에 실려 있다. 과거칠불 중에서 앞에 있는 세 부처님, 즉 비빳씬, 씨킨, 벳사부 부처님 시대의 정법이 특히 짧았음을 말하고 있다. 이들 세 부처님들 시기에 정법시대가 짧았던 것은 교리와 수행방법이 체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빳씬, 씨킨, 벳사부 세 부처님들은 가르침을 설하는데 피곤함을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듣는 것으로 그쳤을 때는 가르침이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잘 기억하고 새겨서 후대에 전승했다면 정법이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세 부처님 시기에 정법이 오래 지속되지 않은 것은 경이나 응송 둥 구분교와 학습계율과 의무계율 등 율장으로 체계화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본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경전무시와 계율무시에 대한 것이다. 이는 한국불교의 문제라기 보다는 동아시아불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른바 사교입선,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과 같은 중국불교의 영향이 크다. 그래서 진리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서 오로지 뜻과 마음으로 전승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글을 쓰다 보면 흔히 듣는 말이 있다. 첫번째는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다. 전승과정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말한다. 또 모두 부처님 말씀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심부터 하는 것이다. 아마 초기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경전을 읽어 보았다면 그렇게 말 할 수 없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초기경전을 비난한다는 말이 성립된다.

비난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이기 쉽다. 수행도 그렇다. 수행을 해 보지 않은 자가 수행을 비난하는 것이다. 신통에 대해 의문 하는 자는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의문한다. 내생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는 것은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온 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반박할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다. 경전을 의심하는 자의 말보다 초기경전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 더 낫다.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글을 쓰다 보면 두 번째로 듣는 말이 있다. 언어로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는 개념화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깨달은 심오한 진리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한다. 그러면서 체험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수영하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과 수영하는 것이 다름을 말한다. 사과도 먹어 보아야 알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말한다. 당연한 말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른바 손가락론에 따르면 말이나 문자로 된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언어라는 것은 개념화 된 것으로 주관이 개입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승된 경전은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고 부처님 친설인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진리는 오로지 마음과 뜻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사이에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전승된 것 만을 진리로 보는 것이다.

진리가 스승에서 제자에게로만 전승된 것이라면 이런 가르침은 비밀가르침이 된다. 오로지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부처님 가르침이 사자상승으로 전승되어 왔다면 이는 진리의 독점이 된다. 극히 소수만이 부처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고 대다수는 소외된다. 더구나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경전에 대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본다면 스승의 권위는 더욱 더 높아질 것이다.

신도들이 무지할수록 성직자의 권위는 높아진다고 했다. 신도들이 경전을 보아서 아는 것이 많아지면 성직자는 곤란에 처할 것이다. 진리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전승된 것만을 진리로 간주했을 때 스승의 권위는 높아 질 것이다. 이렇게 진리의 독점 현상이 발생했을 때 정법은 오래 가지 못한다. 결국 변질되어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진리가 전승된다면 변질되기 쉽다. 마치 귓속말 놀이하는 것처럼 후대로 내려갈수록 원래 가르침과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이는 인도에서 불교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일어났지만 인도에서 불교는 망했다. 불교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동아시아에서 불교는 초기불교와는 전혀 다른 불교가 되었다. 경전무시와 계율무시의 불교가 되었을 때 전혀 다른 불교가 된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정법의 변질이다.

경전과 계율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만 전승되었을 때 정법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마음과 뜻은 변한다. 전승과정에서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과거칠불 중에서 앞서 세 부처님 시대, 즉 비빳씬, 씨킨, 벳사부 부처님 시대의 정법이 짧았던 것에 대하여 그들에게는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이 거의 없었다.”(Vin.III.8)라고 한 것이다.

정법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 계율을 들 수 있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정법도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칠불 중에 세 부처님 시기의 정법이 짧았던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는 학습계율이 시설되지 않았고, 의무계율도 부과되지 않았다.”(Vin.III.8)라고 한 것이다.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불자들은 절에 가서 법회에 참석한다. 법문도 듣고 등도 달고 아기부처님 목욕도 시켜 준다. 점심 때는 비빔밥도 먹고 오후에는 산사음악회도 관람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부처가 왜 출현하였는지에 대해 아는 불자들은 많지 않다.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부처가 출현한 의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 같다.

부처가 출현한 것은 정법시대가 오래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법이 변질되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아득한 세월이 지난 후에 언젠가 부처가 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의 출현은 희유한 일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은 정법시대일까?

지금은 정법시대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고 있고, 팔정도 수행이 있고, 팔정도 수행으로 사향사과와 열반이 있으면 정법시대로 보는 것이다. 이는 정법(Saddhamma)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석으로도 알 수 있다.


“Smp.225
에 따르면, 정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1) 교법상의 정법(pariyattisaddhamma): 삼장의 모든 부처님 말씀, 2) 행도상의 정법(paipattisaddhamma): 열세 가지 두타행, 열네 가지 의무, 여든 두 가지 대의무, 계행-삼매-통찰, 3) 증득상의 정법(adhigamanasaddhamma): 네 가지 고귀한 길(四向)과 네 가지 경지(四果)와 열반을 뜻한다.”(율장 부기 7,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율장통합본, 3214, 6426번 각주)


정법시대를 만족하는 세 가지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경전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 원음이 실려 있는 경전을 말한다. 오늘날 빠알리니까야가 대표적이다.

니까야(經藏)를 포함하여 위나야(律藏)와 아비담마(論藏), 이렇게 빠알리삼장이 전승되어 오면 정법시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빠알리삼장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 그 자체가 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진리가 전승된다고 주장하는 사자상승론자들은 경전에 대해서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보고 있다. 그러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진리가 전승되었을 때 진리가 왜곡되기 쉽다. 결국 정법은 변질되어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오늘날 동아시아 불교에서 볼 수 있다.

불교인들은 부처가 출현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정법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빠알리삼장이 있고, 팔정도수행이 있고, 사향사과와 열반이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


2021-06-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