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절제

김치 가지러 가는 날에

담마다사 이병욱 2022. 3. 6. 07:10

김치 가지러 가는 날에


오늘은 김치 가지러 가는 날이다. 김치냉장고에 김치가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서른 네 해 동안 늘 있는 일이다. 때로 무거운 김치를 전철로 가져다주기도 했다. 장모님은 퍼 주는데 있어서 아낌없는 것 같다. 남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두세 달에 한번은 김치 가지러 간다. 창동에 있는 장모댁로 간다. 지금은 혼자 살고 있는 독거노인이다. 양가 네 분에 중에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사람들은 주는데 인색하다. 나자신부터 그렇다. 가족에게 주는 것도 인색하다. 심지어 자신에게도 인색하다. 그래서 자타카에서는 인색한 자에 대하여 "그는 이러한 재물을 얻고도 자신을 위해 쓰지도 않고 남을 위해서도 보시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재산가는 어느 정도로 인색했을까? 이에 대하여 자타카에서는 최상의 음식을 가져와도 쌀부스러기만 먹고 향수를 뿌린 까씨국의 옷을 마다하고 거친 옷만 입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극단적 인색에 대해서 이런 게송이 있다.

"
인색한 자는 두려워 주지 않는다.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손해이다.
인색한 자가 두려워하는
굶주림과 목마름이야말로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가 겪는 것이다."(자타카 450)

이 게송은 자타카 450 '발라리 꼬씨야의 전생이야기'에 실려 있다. 여기에서 인색한 자에 대하여 굶주린 자와 목마른 자로 표현한 것이 이채롭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자신에게조차 인색한 자라면 이 세상에서조차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는 자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끼고 절약하는 것은 미덕이다. 반면에 소비하는 것도 미덕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도 쓰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타카에 이런 게송이 있다.

"
보시에 앞서 기분이 좋고
보시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보시한 뒤에는 만족한다.
이것이 희사의 구족이다."(자타카 390)

자타카 390 '마이하까의 전생이야기'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이 게송은 보시의 공덕에 대해 노래한 것이다. 보시의 세 과정이 모두 만족 되었을 때 크나큰 과보가 있게 됨을 말한다.

김치가 떨어질 때쯤 되면 김치를 가져가라는 연락이 온다. 수십년 반복되고 있는 일이다. 김치를 만들 때는 기분 좋게 만들었을 것이다. 김치를 줄 때는 기쁨으로 주었을 것이다. 김치를 주고 나서는 만족했을 것이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타인에게도 이와 같은 마음을 낼 수 있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인색하다. 돈 나가는 것에 대하여 살점 떨어져 나가는 것보다 더 아프게 생각한다. 심지어 에스엔에스에서 '좋아요' 추천 누르는 것조차 인색하다. 이럴 진데 남을 위한 보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인색한 자는 죽어서 아귀계에 태어난다고 한다. 늘 굶주림과 목마름만 있는 곳이다. 자신을 위해서도 쓰지 않고 타인을 위해서도 보시하지 않는 자들이 가는 세계를 말한다.

사람들은 기일 때나 명절 때가 되면 제사 지낸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아귀계에 있는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다. 거기에는 부모가 있을지 모른다. 설령 부모가 없더라도 조상들은 있을 것이다.

불교적 관점으로 본다면 제사는 아귀가 된 조상에게 지내는 것이다. 한평생 인색하게 살다가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인색한 삶을 살았을 때 굶주림과 목마름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보시는 재산이 많아야 하는 것일까? 돈을 많이 벌 때까지 보시를 유예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빚을 많이 져서 보시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송사에 휘말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병에 걸려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능력껏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이다. 이 다음에 돈 벌면 하는 것이 아니다. 빚을 다 갚고 하는 것도 아니다. 송사가 끝난 다음에 하는 것도 아니다. 병이 나은 다음에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여기서 힘 닿는 대로 능력껏 하는 것이다. 이런 보시공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
적으면서 사람들은 보시를 행하고
많이 가졌으면서도 보시를 원하지 않는다.
적게 가진 자들이 보시한 시물은
천배나 동일한 것으로 평가된다."(자타카 450)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를 말한다. 많이 가진 자는 보시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도 인색하고 타인에게도 인색하다면, 막대한 불로소득이 생겼더라도 굶주리고 목마른 아귀와 같다. 반면에 가진 것은 없어도 그때그때 능력껏 보시한다면 천배나 동일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같은 보시라고 해도 부자의 보시와 빈자의 보시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월 수입이 천만원인 자가 10만원을 보시했다면 1%가 된다. 월 수입이 백만원인 자가 10만원을 보시했다면 10%가 된다. 이는 후자가 10배 보시공덕이 더 높다.

같은 보시금액이라도 부자와 빈자의 보시공덕에 대한 과보는 다르다. 빈자의 보시공덕이 백배, 천배 높을 수 있음을 말한다. 힘닿는 대로 능력껏 보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게 가진 자들이 보시한 시물은 천배나 동일한 것으로 평가된다."라고 했을 것이다.

창동에 가면 김치만 주는 것이 아니다. 밑반찬 등 이것저것 챙겨준다. 한번 다녀오면 트렁크에 가득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언제까지 받아먹고 살 수 있을까?

 


늘 받기만 해서 주는데 익숙하지 않다.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것처럼 조건없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주기 전에 기분이 좋고, 줄 때 기쁘고, 주고 나서 만족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초월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보시와 보시바라밀은 다른 것이다. 보시는 주는 행위를 뜻하지만 보시바라밀은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바라밀을 뜻하는 빠알리어 빠라미(parami)에 대하여 '초월의 길'로 번역했다.

십바라밀에서 보시바라밀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가장 아끼는 것을 주는 것은 가장 낮은 단계로 이를 일반적 초월의 길(p
āramī)이라고 한다. 자신의 신체 일부를 주는 것은 중간단계로 우월적 초월의 길(upapāramī)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을 승의적 초월의 길(paramatthapāramī)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시와 보시바라밀은 다른 것이다.

보시는 할 수 있어도 보시바라밀 하기는 어렵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을 넘어서 목숨까지 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초월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보살행을 하기 위해서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서른 네 해 동안 받고 만 살았다. 받기만 하다 보니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김치 한박스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 받기만 하고 주는 것에는 인색했다. 늘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살아가는 아귀의 삶과 같다. 나는 언제까지나 받기만 해야 할까?


2022-03-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