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항공을 타고 가다 죽음의 공포를
지금 시각은 6시 정각, 오늘도 하루 해가 떠 올랐다. 오늘은 아침 일찍 출발하여 6시 이전에 일터에 도착했다. 오피스텔 18층 옥상에서 안양시를 촬영했다. 해가 뜨는 동쪽이다. 평촌을 말한다.
해는 구름에 가려 있다. 틈을 비집고 얼굴을 약간 내밀었다. 하루 해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것 같다. 해맞이를 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자 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부자나 가난한자나, 귀한자나 천한자나 모두모두에게 주어신 시간은 같다. 어떤 이는 시간이 길고 지루하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화살처럼 빨리 흘러간다고들 말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람들은 아침이 되면 일어나서 일터로 향한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간다. 매일매일 똑 같은 일이 반복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언젠가 엔진이 멈출 날이 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갔다. 어디로 간 것일까? 간 자들은 말이 없다. 사람들이 간 곳을 향해 모두 그 그곳으로 향한다. 그럼에도 애써 잊으려 하는 것 같다. 감각을 즐기다 보면 인생길 같은 것은 잊어 버린다.
잘 쓰던 전자기기가 어느 날 멈출 때가 있다. 죽은 것이다. 한번 죽으면 다시는 살아나지 않는다. 그 순간부터 고철덩어리가 된다. 사람 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명 기능이 없는 육체는 고기덩어리에 불과하다.
안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페이스북에서 열심히 글을 올리던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 불안하다. 페이스북도 현실공간과 다름 없다. 사람들이 죽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말이 있다. 더 이상 글이 올라 오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언젠가는 엔진이 멈출 것이다. 그런 엔진은 성능이 좋은 것은 아니다. 간신히 끌고 다니는 중고엔진이다. 연식이 있어서 타면 탈수록 폐차 시점은 점점 가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금 이 행복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언젠가 멈출 날이 있을 것이다. 그날은 10년후가 될 수 있고, 20년 후가 될 수 있다. 기대수명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착각이다. 오늘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다. 한시간 후가 될 수도 있다. 아니 5분후를 예측할 수 없다.
요즘 유튜브에서 항공다큐 ‘다큐 9분’를 보고 있다. 항공기 사고에 대한 것이다. 첨단중의 첨단인 항공기는 안전할까? 일단 공중에 뜨면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언제 어떻게 사고가 날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공중에서 사고가 나면 대부분 탑승자 전원사망이라는 대형참사가 난다는 사실이다.
비행기에 대한 공포가 있다. 비행기가 뜰 때 긴장된다. 비행기가 뜰 때만큼은 자세를 바르게 한다. 혹시라도 나의 흐트러진 자세가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기 때문이다. 일단 비행기가 뜨면 안심이다. 그때부터 긴장이 풀어진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 역시 긴장된다. 착륙할 때 역시 자세를 바르게 한다. 활주로에 무사히 내렸을 때 안도한다. 왜 이처럼 비행기에 대한 공포가 생겨났을까? 그것은 좋지 않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96년이었던 것 같다. 그때 유럽과 중동에 갔었다. 해외영업담당 이사와 함께 판촉활동 갔던 것이다. 개발한 위성방송수신기(SVR)를 팔아 먹기 위해서였다. 독일, 스페인, 터키, UAE를 갔었다. 30대 중반 과장시절이다.
이스탄불에서 아부다비로 가는 도중에 끔찍한 경험을 했다. 이스탄불에서 두바이로 가는 도중에 아부다비를 경유 했는데 사막을 지나다가 죽음의 공포를 느낀 것이다.
비행기는 한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동체는 “꽝”소리와 함께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기도 했다. 창밖에는 비가 엄청나게 때리고 있었다. 비행중에 악천후를 만난 것이다.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어떤 아랍 사람은 실신하기도 했다. 승무원이 산소호흡기를 가져다 줄 정도였다. 짐칸에 있던 짐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누구도 비명을 지르거나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것 같다.
도저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지상이라면 탈출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라면 바다에 뛰어들기라도 할 것이다. 하늘에서는 탈출 할 수가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죽음의 공포는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이 몸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창밖에는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천정에 있는 짐칸 문이 열려서 짐이 쏟아져 내릴 정도였다. 하늘이라 도대체 어찌해 볼 방법이 없었다. 참으로 갑갑했다. 마침내 흔들림은 멈추었다. 아부다비가 가까워져 왔을 때는 정상적으로 되었다.
아부다비에 도착했다.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져서 쇼핑을 했다. 화려한 쇼핑몰을 보니 공포의 순간과 대조되었다. 불과 한시간 전까지만 해도 공포에 떨었는데 이곳 쇼핑몰 사람들은 너무나 태연한 것이었다. 극과 극의 모습을 본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나간다. 수없이 비행을 해도 사고는 좀처럼 볼 수 없다. 그러나 항공기 사고는 한번 나면 대형사고이다. 탑승자 전원사망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비행기에서 공포를 체험한 이후 비행기 타는 것이 두려워졌다. 이 비행기가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가는 것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이다. 이륙을 할 때 긴장되고 착륙을 할 때는 안심이 되었다. 옛날에는 어땠을까?
배만 타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비행기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배로 이동했다, 이른바 대양항해를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도 대양항해가 있었던 것 같다. 상윳따니까야 ‘참사람과 함께의 경(Sabbhisutta)’(S1.31)이 있다. 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참사람과 함께 지내며
참사람과 함께 사귀어라.
참사람의 참다운 가르침을 알면
뭇삶들은 행복한 곳으로 가네.”(S1.31)
이 게송은 사뚤라빠 무리의 하늘 사람들 중에 한 천신이 읊은 것이다. 여기서 행복한 곳은 수가띠(sugati)를 말하는데 육도윤회에서 천상과 인간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면 선처, 좋은 곳에 태어남을 말한다.
이 게송이 있게 된 인연담이 있다.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한 때 선원 칠백명이 탄 상선이 있었는데 바다를 항해하던 중에 무시무시한 폭풍에 직면하였다.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자신들의 신에게 미친듯이 매달리며 기도하였다.
그런데 그들 선원 중에 어떤 이는 마치 요기처럼 다리를 꼬고 두려움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는 세 가지 피난처(三寶)와 다섯 가지 가르침(五戒)에 떠 맡겼었기 때문에 그 어떤 두려움도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그와 똑같이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선원들을 백명씩 일곱 그룹으로 나눈 후에 각 그룹에 피난처들과 교훈을 주었다. 이렇게 삼귀의와 오계 수지가 완성되는 순간 배는 바다에 의하여 삼켜져 버렸다.
이와 같은 최종 행위에 대한 과보로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속한 그룹의 리더와 함께 즉각적으로 삼십삼천에 태어났다. 그들은 리더들의 호의로 행운을 얻게 된 것을 알고나서 그들의 리더를 칭찬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면전에 나타났다.”(CDB 363P 각주 59, 빅쿠보디 각주번역)
빅쿠보디의 영문각주를 번역해 본 것이다. 빅쿠보디는 주석 ‘Srp.I.54’에 있는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알기 쉽게 설명한 것이다.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대양을 항해하는 배는 오늘날 비행기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대양을 항해하다 보면 변수가 많기 때문에 늘 사고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날씨가 좋지 않을 때, 폭풍우가 몰아 칠 때 사고가 나기 쉽다. 비행기 사고도 날씨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폭풍우로 인하여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대양이기 때문에 바다에 빠져도 죽고 배에 가만 있어도 죽는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것이다.
난파 위기에서 신을 믿는 선원들은 어땠을까?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찾았을 것이다. 신의 이름을 부르며 애타게 부르짖고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죽음의 순간에도 태연한 선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불자였다. 이에 대하여 “마치 요기처럼 다리를 꼬고 두려움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라고 했다.
죽음의 순간에 초연할 수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 가능함을 말한다. 선원들이 각자 자신이 믿는 자신의 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을 때 불자는 조용히 죽음의 순간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이 거룩하게 보였던 것 같다.
선원들은 명상하는 사람을 보고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이렇게 태연자약(泰然自若)할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이 불자는 “세 가지 피난처(三寶)와 다섯 가지 가르침(五戒)에 떠 맡겼었기 때문에 그 어떤 두려움도 없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선원들은 불자에게서 희망을 보았던 것 같다. 이에 불자는 선원들을 백명씩 일곱 그룹으로 나눈 후에 각 그룹에 피난처로서 삼보와 교훈으로서 오계를 주었다. 불자가 되게 한 것이다.
불교인이 되려면 먼저 삼보에 귀의 해야 한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대하여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아야 불자가 되는 것이다. 삼보는 불자가 되는데 있어서 충분조건이 된다, 다음으로 오계를 지켜야 한다. 그래서 불자가 된다는 것은 삼귀의와 오계를 받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불자는 선원들을 구제했다. 무려 7백명의 선원을 불자로 만든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그것도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 하고 오계를 받아 지녔을 때 어떤 과보가 일어났을까? 놀랍게도 7백명의 선원들 모두가 천상에 태어난 것이다. 삼십삼천에 태어났다.
삼십삼천에 태어난 천신들은 부처님을 만나 뵙고자 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계신 곳에 나타나서 게송으로 가르침을 찬탄했다. 가르침을 믿고 따르면 좋은 곳, 선처에 태어남을 알려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참사람과 함께 지내며
참사람과 함께 사귀어라.
참사람의 참다운 가르침을 알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네.”(S1.31)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윤회를 끝내라는 말과 같다. 괴로움을 끝내서 불사(不死)가 되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나라에 태어나 영원토록 오래 사는 것보다 윤회를 끝내는 것이 더 나음을 말한다.
코로나가 끝나가고 있다. 새로운 변종이 출현하여 다시 유행하고는 있지만 이제 코로나는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니다. 오미크론을 걸려 보니 감기보다 못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는 것 같다. 에스엔에스에 해외여행에 대한 글이 올라 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날 해외 나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데 비행기는 과연 안전할까? 하늘에서 폭우를 만나 기체가 흔들릴 수도 있고 돌풍을 만나 날개가 부러질 수도 있다.
유튜브에서 ‘다큐 9분’을 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항공사고가 일어난다. 그런데 사고가 나면 탑승자 전원사망이라는 대형 참사가 난다는 것이다. 정비가 잘못 돠어서도 사고가 날 수도 있고 테러에 의해서 사고가 날 수 있다. 이렇게 사고가 났을 때 공중에서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터키항공을 타고 가다 죽음의 공포를 맛보았다. 다시는 비행기를 타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타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죽음의 공포와 마주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윳따니까야 ‘참사람과 함께의 경’(S1.31)에서 보는 것처럼 명상자의 모습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삼보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했을 때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삼보를 피난처로 하여 마음을 청정하게 했을 때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려 주는 것 같다. 글을 쓰다 보니 7시 26분이 되었다. 이제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한다.
2022-07-1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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