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천지개벽같은 새벽의 붉은 기운

담마다사 이병욱 2022. 7. 31. 07:29

천지개벽같은 새벽의 붉은 기운

 

 

어제 일몰이 대단했었던 것 같다. 에스엔에스에 올려진 도시의 일몰 사진을 보니 하늘이 시뻘겋게 달구어졌다. 장엄한 일몰이다. 그러나 이내 어둠이 깔린다. 이어지는 사진을 보니 불야성을 이룬 도시의 밤이다.

 

오늘 아침 일출을 보았다. 새벽에 일어나 일터로 가서 보았다. 오피스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서 동쪽 하늘을 바라다 보았다. 평촌이 있는 동쪽방향이다.

 

오늘 일요일이다. 그럼에도 일터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밀린 일을 마무리 작업해야 한다. 무더운 여름날 농부가 새벽같이 일터에 나가듯이, 밥도 먹지 않고 일터로 달려 갔다. 사실 일출 직전의 여명을 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8층 꼭대기층에 도착한 시각은 526분이다. 동쪽 하늘을 보니 벌겋게 달구어져 있다. 어제 에스엔에스에서 사진으로 본 일몰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런 광경은 오래 가지 않는다. 불과 10분 정도 보여준다.

 

 

일몰과 일출 때 붉은 하늘을 보기가 쉽지 않다. 조건이 맞아야 한다. 구름이 끼어 있어야 하고 습도도 높아야 한다. 비가 온 후 구름 낀 날 일몰이나 일출 때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일몰도 아름답고 일출도 아름답다. 공통적으로 장엄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하늘과 구름과 태양이 만들어 낸 조화이다. 이런 일몰과 일출을 바라보면 태초의 신비를 보는 것 같다.

 

 

일몰이 좋을까? 일출이 좋을까?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일몰을 예찬한다. 아마 활동하는 기간에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일출은 보기가 쉽지 않다. 모두 잠 들어 있을 때 여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몰은 아름답다. 어쩌면 찬란한 아름다움인지 모른다. 곧 스러지고 말 것임을 알기 때문에 애처롭게 보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 박완서는 그녀의 자전적 소설인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먹었을까에서 저녁노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해 놓았다.

 

 

내가 최초로 맛본 비애의 기억은 앞뒤에 아무런 사건도 없이 외따로인 채 다만 풍경만 있다. 엄마 등에 업혀 있었다. 막내라 커서도 어른들에게 잘 업혔으니 다섯 살때쯤이 아니었을까. 저녁노을이 유난히 새빨겠다. 하늘이 낭자하게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마을의 풍경도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그냥 딴 동네 같았다. 정답던 사람도 모닥불을 통해 낯설듯이.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내 갑작스러운 울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순수한 비애였다. 그와 유사한 체험은 그 후에도 또 있었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먹었을까 31)

 

 

작가는 유년시절 저녁노을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마치 피 빛처럼 빛나는 장엄한 저녁노을을 보고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던 것 같다. 이를 인생에 있어서 최초의 비애라고 했다.

 

다섯 살짜리 아이는 왜 저녁노을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을까? 화두처럼 다가온다. 아마도 직감적으로 마지막인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의 황혼에서 스러지기 전에 마치 저녁노을처럼 한번 벌겋게 달구었다고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하늘이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보면 약간 슬픈 느낌이 생겨난다. 이를 찬란한 슬픔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치 모닥불이 꺼지기 전에 한번 확 일어났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인생의 황혼에 이른 자는 저녁노을을 보면서 인생무상을 생각하는 것 같다.

 

저녁노을은 장엄하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벽 여명 때 붉은 하늘은 누구나 볼 수 없다. 부지런한 사람만 볼 수 있다.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만이 마치 천지창조와 같은 장엄한 하늘을 볼 수 있다.

 

오피스텔 꼭대기층에서 동쪽 평촌신도시 쪽을 30분가량 바라 보았다. 붉은 하늘은 526분부터 536분까지 10분 동안 절정이었다. 이후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 했다. 5 56분이 되자 해가 떴다. 해가 뜸으로 인하여 상황은 종료 되었다.

 

 

장엄한 일몰은 찬란한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엄한 일출은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아무래도 천지창조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해가 뜨기 전에 새벽이 오는데 붉은 기운을 내면서 오는 것이 세상이 새로 시작되는 것 같다.

 

동쪽 하늘을 바라 보았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벌겋게 달구어 졌을 때 장엄한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에 대한 적절한 표현은 어떤 것이 있을까? 빠알리어 상베가를 떠올렸다.

 

 

빠알리어 상베가는 영어로 ‘agitation, fear, anxiety; thrill, religious emotion’라는 뜻이 있다. 전율과 공포의 뜻도 있지만 종교적 감흥이라는 말이 가장 와 닿는다. 니까야에서는 감동이라고 번역했다. 어떤 감동인가?

 

부처님 설법을 들으면 감동하게 되어 있다. 감동하기 전에 먼저 두려움과 전율이 일어난다. 그래서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라고 했다.

 

부처님 설법을 들으면 왜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질까? 이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특히 천신들에게 있어서 그렇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저 장수하는 하늘사람들은 아름답고 지극히 행복하고 높은 궁전에 오래도록 살아도 여래의 설법을 듣고 대부분벗이여,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상주하지 않는 것을 상주한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실로 영원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라고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

 

 

천신들은 복과 수명이 보장되어 있다. 반대로 인간에게는 복과 수명은 보장되어 있지 않다. 어떤 차이일까? 업대로 살기 때문이다. 천상의 존재는 선업을 지었기 때문에 복과 수명이 보장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업대로 살기 때문에 복과 수명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천신들은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자신이 윤회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 버렸다. 그래서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여기고,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보는 영원주의적 견해가 생겨났다.

 

부처님은 천신들에게 영원주의적 견해를 깨 주었다. 이에 천신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천신들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언젠가는 죽어야 할 존재임을 알게 된 것이다.

 

윤회하면 어떤 세계에 떨어질지 알 수 없다. 미얀마 속담에 빛나던 범천도 돼지 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하느님(brahma)도 복과 수명이 다하면 축생으로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 그러나 이내 전율이 일어난다. 그것은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는 감동이 일어난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두려움(bhaya)과 전율(santāsa)과 감동(savega)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무상을 깨닫고 난 후 정신적 전율로서 먼저 두려움이 일어난다. 무상에 대한 강력한 통찰을 할 때는 감동이 일어나는데 이를 상베가라고 한다.

 

상베가는 지혜에 의한 두려움을 체험하는 것이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기는 자에게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일차적인 통찰이 일어나는데 이를 전율에 따른 두려움이 일어난다고 했다. 다음으로 무상한 것을 통찰했을 때 역시 전율이 일어 나는데 이를 감동이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두려움, 전율, 감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상베가는 두려움, 전율, 감동을 모두 포괄하게 된다. 이는 외경 또는 경외에 대한 것으로 종교적 감흥(religious emoti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아침 일출을 보면서 종교적 감흥을 느꼈다. 벌겋게 물든 하늘의 구름은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 했다. 30분에 걸쳐서 동녘을 관찰했다. 마침내 556분이 되자 해가 떠 올랐다. 동시에 벌겋게 물들었던 하늘도 사라졌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2022-07-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