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없으면 환속하시라!
징징대는 스님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스님은 돈이 없다고 한다. 에스엔에스에서 돈 좀 달라고 한다. 대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스님을 비구라고 한다. 비구는 빅쿠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음역이다. 그렇다면 빅쿠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런 게송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걸식을 한다고
그 때문에 걸식자가 아니니
악취가 나는 가르침을 따른다면
걸식 수행자가 아니네.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S7.20)
어느 바라문 걸식자가 부처님에 물었다. 그는 "존자 고따마여, 저도 걸식자이고 그대도 걸식자입니다. 우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S7.20)라며 물어 물어 본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걸사와 걸식자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
걸사는 무엇이고 걸식자는 무엇인가? 가장 큰 차이점은 청정함에 있다. 똑같이 빌어먹고 살지만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걸사이고,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면 걸식자와 같다는 것이다.
걸사는 빅쿠(bhikkhu)를 번역한 말이다. 걸식자는 빅카까(bhikkhaka)를 번역한 말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번역에서는 빅쿠를 수행승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에서는 비구로 번역했다.
걸식자를 뜻하는 빅카까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았다. 영어로 ‘a beggar; mendicant’로 설명되어 있다. 구걸자의 뜻이다. 속된 말로 거지를 말한다. 빌어먹는 자를 빅카까라고 하는 것이다.
걸사를 뜻하는 빅쿠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았다. 영어로 ‘A fully ordained disciple of the Buddha is called a bhikkhu’라고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의 계행을 완전히 지키는 자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걸사와 걸식자의 차이는 계행의 여부에 달려 있다.
빅쿠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에서는 “Mendicant monk”라고 했다. 빌어먹는 승려를 말한다. 이는 문자적 해석이다. 빅쿠는 문자적으로 “he who begs” 의 뜻이다. 구걸하는 자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놀랍게도 “but bhikkhus do not beg”라고 되어 있다. 빅쿠는 구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어지는 긴 설명을 보면 이해가 간다.
“A fully ordained disciple of the Buddha is called a bhikkhu. "Mendicant monk" may be suggested as the closest equivalent for "Bhikkhu", literally it means "he who begs" but bhikkhus do not beg. They silently stand at the door for alms. They live on what is spontaneously given by the supporters. He is not a priest as he is no mediator between God and man. He has no vows for life, but he is bound by his rules which he takes of his own accord. He leads a life of voluntary poverty and celibacy. If he is unable to live the Holy Life, he can discard the robe at any time.。”(bhikkhu, 빠알리전자사전 PCED194)
이 문장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구족계를 받은 부처님의 제자를 빅쿠라 한다. 걸식에 의존하는 승려는 가장 빅쿠다운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빅쿠는 문자적으로 ‘구걸하는 자’를 의미하지만 실제로 구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조용히 자선을 바라며 문 바깥에 서 있다. 그들은 보시자가 자발적으로 주는 것에 의지하여 살아 간다. 그는 신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니다. 그는 생계를 위한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고 천명한다. 다만 자신이 준수하는 계율안에서 살아간다. 그는 자발적 빈곤과 금욕적 생활을 한다. 만일 그가 성스런 삶을 살 자신이 없다면, 그는 언제든지 가사를 버릴 수 있다.”(진흙속의연꽃역)
참으로 놀라운 문장이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스님상을 부수는 것 같다. 무엇보다 구걸하는 자이지만 구걸하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자선을 바라며 문앞에서 조용히 서 있을 뿐이라고 했다.
빅쿠는 신과 인간의 중재자도 아니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당시 바라문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음을 말한다. 제사를 지내는 사제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런 점은 한국불교와 매우 대조된다. 한국불교는 마치 제사불교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빅쿠는 생계를 위해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업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스님이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부업에 열중한다면 스님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스님의 본본사가 있음에도 돈벌이 수단으로 부업을 한다면 비난 받아 마땅할 것이다. 설령 포교를 위한 수단으로 부업을 하는 것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모두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빅쿠는 자발적 빈곤과 금욕적 생활을 한다고 했다. 스님이 부자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소유와 관련된 것이다. 스님이 돈을 벌어서 소유하게 되면 금욕적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 재산을 물려 주는 경우에도 해당될 것이다.
염불선으로 유명한 청화스님이 있다. 청화스님은“스님들이 호주머니에 돈 있으면 공부안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출가자가 많은 돈과 재물을 소유하고 있다면 감각적 욕망에 빠지기 쉬움을 말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누군가 금과 은을 허용할 수 있다면 그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S42.1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빅쿠는 언제든지 가사를 버릴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계율을 지킬 자신이 없으면 환속하는 것을 말한다. 이백개 이상이나 되는 구족계를 지켜야 하는데 지킬 자신이 없으면 언제든지 가사를 벗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남방테라와다에서는 출가와 환속이 자유롭다. 최대 일곱번까지 허용된다고 한다. 단 바라이죄를 짓지 않았을 때 가능하다.
빅쿠 되기가 쉽지 않다. 구족계라 불리우는 비구계를 지키며 살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빅쿠가 되는 것일까?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에서 잘 드러난다.
“수행승들이여, 이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다. 세상에는 ‘손에 발우나 들고다녀라!’라고 하는 저주가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훌륭한 아들들은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 그러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결코 왕이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강도가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는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떨어졌다. 괴로움에 떨어져 괴로움에 둘러싸여 있다. 적어도 괴로움의 다발들이 종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러한 것이다.”(S22.80)
빅쿠는 탁발을 특징으로 한다. 걸식하는 자가 빅쿠인 것이다. 걸식에 의존해야 청정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걸식에 의존하면 소유하지 않게 되어서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빅쿠가 된다는 것은 탁발을 뜻하는 말도 된다.
빅쿠가 되는데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경에서는 누군가 강요해서 빅쿠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빚을 졌기 때문에 빅쿠가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도망자가 빅쿠가 되어서도 안된다. 생계 때문에 빅쿠가 되어서도 안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생계형출가와 도피형출가가 되어서는 안된다. 출가는 자발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래야 발우를 들 수 있다. 그런데 발우를 드는 것에 대하여 “삶의 끝이다.”라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발우를 드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하찮고 가장 비천한 상태임을 말한다.
흔히 욕설 중에 “빌어먹을 놈!”이라는 말이 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말이 있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하여 “손에 발우나 들고다녀라!”라는 저주도 있다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는 저주의 말이다. 주석에 따르면 “세상사람들이 분노하면 ‘중옷이나 입고, 그릇을 들고 밥이나 빌러 돌아다녀라!’라고 그들의 적을 공격하였다.”(Srp.II.301)라고 설명되어 있다.
출가는 왜 하는 것일까? 부처님은 출가의 목적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했다. 이는 경에서 “나는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떨어졌다. 괴로움에 떨어져 괴로움에 둘러싸여 있다. 적어도 괴로움의 다발들이 종식되어야 한다.”(S22.80)라고 표현된 것에서 알 수 있다.
누가 출가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분명하다.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하는 것이다.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출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탁발 등으로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것이다. 청정한 삶이 완성되었을 때 출가목적이 달성될 것이다.
청정한 삶은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를 번역한 말이다. 청정범행이라고도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라문 인생 사주기에서 범행기가 연장된 것을 말한다. 그래서 순결한 삶이라고도 한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청정한 삶은 팔정도를 닦아서 완성된다고 했다.
팔정도를 닦으면 열반과 사향사과를 실현할 수 있다. 마침내 모든 번뇌에서 해방되었을 때 아라한선언을 하게 된다. 어떻게 선언하는가? 이는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S22.80)라며 아라한선언을 하는 것이다.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모두 똑 같은 스님은 아니다. 스님 같지 않은 스님도 있다. 구걸하는 스님도 해당될 것이다. 계좌번호를 알리며 돈을 달라고 했을 때 더 이상 스님이라고 볼 수 없다. 걸인을 뜻하는 빅카까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계행을 지켜야 스님이다. 계행을 지킬 자신 없으면 환속해야 한다. 스님생활이 힘들면 환속에서 재가불자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주변에서 스님 같지 않은 스님들을 너무 많이 본다. 스님도 아니고 재가불자도 아니다. 이를 반승반속(半僧半俗)이라 할 것이다.
이띠붓따까에 ‘삶의 경’이 있다. 부처님은 스님도 아니고 재가불자도 아닌 반승반속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출가한 훌륭한 아들이 탐욕스럽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자극되고, 마음에 분노가 넘치고, 정신적으로 사유가 퇴락하고, 새김을 잃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올바로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이 산란해지고, 감각능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마치 쇠똥을 가운데 바르고, 양쪽 끝이 타다 남은 태워진 화장용 장작더미는 마을에서 목재로 사용할 수 없고 숲에서도 목재로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재가자로서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고, 수행자의 목적도 성취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It.89)
부처님은 반승반속에 대하여 화장터에서 타다 만 나무토막같다고 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음을 말한다.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재가자로서 즐거움도 누리지 못한다’라고 했다. 이런 반승반속이 한국불교에는 너무 많다. 에스엔에스에서도 볼 수 있다.
빅쿠는 걸식자를 말한다. 그러나 빅쿠는 걸식하지 않는다고 했다. 탁발할 때 집앞에서 조용히 서 있을 뿐이라고 했다. 탁발음식을 얻지 못하면 굶어야 할 것이다. 왜 이런 고행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빅쿠에 대하여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수행승이라고 한다.(Samsara bhayam ikkhati bhikkhu)”(Vism.1.7)이라고 했다. 주석에 따르면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는 누구나 빅쿠라고 했다. 재가불자라도 윤회에서 두려움을 본다면 빅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빅쿠를 광의로 해석한 것이다.
스님들은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는다. 당연히 구족계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드문 것 같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계율대로 살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탁발을 하고 자자와 포살을 한다. 한국불교는 어떤가?
한국불교에서 비구계는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이백가지가 넘는 구족계를 지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탁발이 가능하지 않다면 오후불식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한국불교 스님들 같다. 어쩌면 반승반속인지 모른다. 스님들이여, 계행을 지킬 자신 없으면 환속하시라!
2022-08-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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