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최상의 보리똥 담금주

담마다사 이병욱 2022. 8. 29. 12:34

최상의 보리똥 담금주

 


"수라 메라야 맛자 빠마닷타나 베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불과 사흘전에 합송한 것이다. 오계에서 불음주계에 대한 것이다.

오늘 불음주계를 어겼다. 아니 맨날 어기고 있다. 집에서 밥 먹을 때 반주로 한잔 하기 때문이다. 저녁 밥 먹기 전에 한잔한다. 담금주를 소주 잔에 한잔 가득 담아 털어 넣는 것이다.

오늘 점심 때 담금주 한잔 마셨다. 보리똥 담금주이다. 보리똥 과일주라고도 볼 수 있다. 여러 담금주 중에 보리똥주가 최상이다.

 


보리똥주가 왜 최상인가? 맛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주의 쓴맛이 전혀 나지 않는다. 단맛이 가미 되어 있다. 무엇보다 부드러운 것이다. 무려 30도짜리 담금주를 넣었으나 전혀 알콜 도수가 느껴지지 않는다. 딱 한잔만 마셨다.

술을 딱 한잔만 마셨어도 불음주계를 어긴 것이다. 그렇다고 계가 파한 상태로 있을 수 없다. 파한 계는 복원시켜 놓아야 한다. 매달 두 번 열리는 금요니까야모임이 있는데 그때 다시 받아 지니면 된다.

계를 어기면 다시 받아 지녀야 한다. 법회에 참석해서 오계를 합송할 때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라며 받아 지니는 것이다.

한국불교 법회에서는 오계를 받아 지니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삼귀의는 하지만 오계는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은 계가 파한 상태로 있게 되는 것 같다. 자연스럽게 오계를 지키지 않는 삶이 된다.

오계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불살생계라면 "살생하지 말라."가 되는데 이와 같은 명령조의 불살생계는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불살생계는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가 된다. 살생을 삼가는 학습계율이다.

오계는 기독교의 십계명과 같은 정언명령이 아니다. 오계는 학습계율(sikkhāpada)이다. 평생에 걸쳐서 트레이닝으로 완성되는 계율임을 말한다. 그래서 '삼간다(veramaṇī)'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 학습계율을 어겼다. 그런데 재가의 생활을 하다 보면 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불음주계가 그렇다.

최근 유튜브에서 '송승환의 원더풀라이프'를 보았다. 노주현 편에서 음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노주현에 따르면 70년대 TBC시절에 녹화가 끝나면 꼭 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이유는 "허전해서"라고 했다.

노주현은 왜 허전하다고 했을까? 아마 그것은 힘든 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힘든 일을 마쳤을 때 강한 보상심리가 뒤따르는데 이를 허전하다고 말한 것이다.

노동을 하고 나면 배가 고프다. 노동의 강도가 세면 그만큼 보상심리도 강해진다. 옛날 농경사회 때 축제가 있는 이유에 해당된다. 학생들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마쳤을 때 나이트클럽으로 달려 가는 것도 강력한 보상심리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직장에서 종종 회식하는 것도 노동에 대한 보상심리에 따른 것이다.

오늘 아침 일요일임에도 일터에 갔다. 일터에 6시에 도착해서 밀린 일을 처리 했다. 정신이 맑을 때 힘이 있을 때 처리하면 효과적이다.

오늘 오전 빡세게 일을 하고 났더니 강한 보상심리가 발동되었다. 배가 고팠다. 잘 먹어야 한다. 잘 먹어야 버틴다. 밥을 먹기 전에 보리똥 담금주를 한잔 털어 넣었다. 식욕을 돋우는데 효과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담금주 한잔은 음식이나 다름 없다.

술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음식으로 마시는 것이다. 취하기 위해서 마신다면 여러 잔 마셔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음식으로 마시고자 한다면 한두잔이면 족하다.

담금주 마실 때는 딱 한잔만 마신다. 마치 서양사람들이 식사하기 전에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하여 불음주계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생업을 가지고 있는 한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수행처에서 오로지 수행만 한다면 술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한시간 좌선 후에 허전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보상심리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출가자들이 술을 마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수행승들이여, 열등한 것으로 최상에 도달할 수 없으며, 수승한 것으로 최상에 도달할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청정한 삶은 최상의 제호이다. 그리고 여기에 스승이 있다.”(S12.22)

게송에서 ‘최상의 제호(醍醐)'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제호는 빠알리어 'maṇḍapeyyam’을 번역한 말이다. 이는 ‘우유에서 정제한 최상의 음료’라는 뜻이다. 그러나 제호는 술이다. 유제품 중에서 최상을 제호라고 하고, 술 중에서 최상을 제호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최상의 술, 제호로 가르침을 설했을까?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Srp.II.50에 따르면, 제호(醍醐:maṇḍa)는 아주 청정하게 위에 뜨는 양질의 술을 뜻한다고 한다. 하느님의 삶 또는 청정한 삶[梵行]을 양질의 술에 비유한 것에 관해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논의하고 있다.

‘술은 아무리 청정해도 마셔서는 안될 것이다. 술을 먹고 나서 큰 길에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어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된다면, 그 술이 아무리 양질이라고 해도 마셔서는 안된다.’

그러나 청정한 삶이라는 양질의 술을 마실 수 있는 까닭은 용맹정진하는 ‘스승이 여기에 있다.’라는 것 때문이다.”(KPTS본 상윳따 1권, 118번 각주)

술은 아무리 청정해도 마셔서는 안될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청정한 술, 제호를 마실 수 있는 것은 스승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환자는 의사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얼마만큼 약을 복용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의사가 앞에 있어 그가 약을 마셔야 한다면, 그의 앞에서 의심하지 않고 마실 수 있다.”라 는 것이다. 이는 스승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뜻한다. 그 양질의 술은 다름 아닌 ‘청정한 삶(Brahmacariya)’라는 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최상의 음료, 최상의 술 제호는 청정한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보리똥주는 지난 6월 마지막째 주 일요일에 불성사에서 수확한 것이다. 담금주를 만들기 위해서 관악산 깊은 곳에 가서 따 온 것이다. 숙성된지 이제 두 달 되었다. 이제까지 맛본 담금주 중에서 최상이다. 앞으로 매년 보리똥 담금주를 만들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든다.

2022-08-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