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디가니까야 대륙 대장정을 떠나며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0. 18. 07:04

디가니까야 대륙 대장정을 떠나며

 


디가니까야를 받았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받은 것이다. 지난 주 금요일 금요니까야모임 갔었을 때 전재성 선생에게 한권 달라고 했다. 이렇게 막 달라고 해도 되는 것일까? 책값은 주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오년 전부터 후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책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후원 금액은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다. 어떤 때는 출간을 앞두고 나로 봤을 때는 큰 금액을 후원하기도 한다. 때에 따라 어느 달에는 두 배로 후원하기도 한다. 이번 달에는 세 배로 후원해야겠다.

경전을 읽는 올바른 태도

디가니까야를 가져 온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완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정을 보기 위한 것이다. 디가니까야를 거의 십년전에 구입해서 읽었지만 모두 다 읽은 것은 아니다. 부분적으로 읽었다. 그러다 보니 경전 곳곳에 노랑형광메모리펜 칠로 가득하다. 사실상 다 읽은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읽었을 뿐이다.

경전을 어떻게 해야 잘 읽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다. 첫 번째 경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경까지 주석을 포함하여 빠짐없이 읽는 것이다. 마치 소설읽듯이 읽는 것이다. 이렇게 읽어야 읽는 맛이 난다.

매일 조금씩 조금씩 읽어야 한다. 한꺼번에 많이 읽으면 금구성언이 머리에 잘 넣어지지 않는다. 마치 병아리가 물 한모금 마시고 하늘을 쳐다보고, 또 물 한모금 마시고 하늘을 쳐다보듯이, 경전은 한구절 읽고 음미하고, 또 한구절 읽고 음미해야 한다. 그래야 머리에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합본화 작업을 보면

디가니까야는 2011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현재 판본을 보니 2016년에 부분개정이 있었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내년에는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를 합본하여 출간할 것이라고 했다. 아마 이런 시도는 세계최초가 될 것 같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는 수많은 합본이 있다. 상윳따니까야는 7권으로 된 것을 합본으로 하여 한권으로 만들었다. 마치 바이블처럼 인조가죽케이스로 만든 것이다. 2단 칼럼에 폰트사이즈는 작다. 종이는 매우 얇고 금박 처리되었다. 놀랍게도 2,800페이지 안에 방대한 상윳따니까야 7권이 다 들어간 것이다.

 


합본은 상윳따니까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앙굿따라니까야 합본도 나왔다. 앙굿따라니까야 11권을 한권으로 만든 것이다. 역시 인조가죽케이스로 된 것이고 2단 칼럼에 2,780페이지에 달한다. 마치 압축기술의 정수를 보는 것 같다.

율장도 합본 되었다. 율장은 대품, 소품, 비구계, 비구니계로 발행 되었는데 새로 완역된 부기를 합하여 한권으로 만든 것이다. 역시 인조가주케이스로 된 것이고 2단 칼럼이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 합본은 세 종류에 이른다. 여기에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를 합본한다면 합본 종류는 네 종류에 이를 것이다.

머리맡에 놓고서

경전읽기를 일상화 하고자 한다. 매일 글을 쓰는 것이 일상이듯이 경전읽기를 일상화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전을 머리맡에 놓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머리맡에 있는 것은 율장합본이다. 디가니까야를 교정보는 식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잠시 율장 보는 것을 미루었다. 먼저 디가니까야부터 보아야 한다.

디가니까야 초판과 개정판을 보니 두께에서 비교된다. 초판이 훨씬 더 두껍다. 그렇다고 페이지에서 차이 있는 것은 아니다. 페이지는 동일하다. 다만 종이 두께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두께에서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개정판 디가니까야를 열어 보았다. 마치 새교과서를 열어 보는 듯 산뜻하다. 앞으로 읽을 때마다 노랑형광메모리칠이 칠해질 것이다. 더 중요한 부위는 분홍색 칠이 칠해질 것이다. 진도가 다 나갔을 때는 온통 울긋불긋 단풍 든 것처럼 색이 칠해져 있을 것이다.

니까야를 열 때 마다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다. 경전에 있는 말이 마음에 쏙쏙 들어 오는 것은 왠 일일까? 그만큼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탐, 진, 치를 소멸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일 것이다. 탐, 진, 치라는 오염원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이런 가르침이 수천, 수만 가지 이야기로 전개되어 있다.

어떤 학자가 말하기를

어떤 학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도 현시대에 맞게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현시대에 맞게 경전을 편집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현시대에 맞는 경전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학자들이 경전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할 때 의문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과연 그들은 경전을 읽어 보았을까?”라는 의문이다. 아마 경전을 읽어 보았을 것이다. 필요한 부분만 읽어 보았을지 모른다.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보았다면 현시대에 맞는 해석이라든가, 현시대에 맞는 편집이라든가, 현시대에 맞는 새로운 경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 가르침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여기에 빼고 더할 것도 없다. 전승된 경전 그 자체로 받아 들이면 된다. 그럼에도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려 한다든가, 더하고 빼서 새로운 경전을 만들어내고자 한다면 가르침을 훼손하는 것이 된다.

 “안봤으면 말을 하지 말어.”

요즘 최준식 선생의 죽음학 강의를 듣고 있다. 유튜브에서 시리즈로 방영하고 있다. 불교TV(BTN)에서 방영한 것을 유튜브로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죽음학 강의는 다른 방송에서 볼 수 없다. 공중파방송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죽음을 주제로 하는 방송에 대해서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불교TV에서 강의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최준식 선생의 죽음학 강연에 대하여 메모하며 듣는다. 최준식 선생에 따르면 어떤 이는 환생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어떤 이는 과학적 증거를 대라고 말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럴 때 “책을 읽어 보았습니까?”라고 말한다고 한다. 대개 책을 읽어 보지 않고 과학적 증거를 대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하는 말은 “안봤으면 말을 하지 말어.”라고 했다.

비판이나 비난을 일삼는 자들이 있다. 대개 해보지 않은 자가 비난이나 비판을 일삼는다. 수행을 해보지 않은 자가 수행을 비난하는 경우도 해당된다. 누군가 도를 말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이 크게 웃어버리는 경우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마친가지로 니까야를 읽지 않은 사람이 니까야를 비난한다. 후대에 편집 되었다든가, 부처님의 원음이 아니다라는 식의 말이다. 이런 경우 해 주고 싶은 말은 “읽어 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어.”라는 말이다.

초월적이고 신화적 이야기를 접했을 때

니까야를 읽어 보면 초월적인 이야기 많다. 신화적인 이야기도 있고 신통에 대한 것도 있다. 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다음에 설법을 해야 할지 망설일 때 사함빠띠가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경에서는 “그 때 하느님 싸함빠띠가 마음속으로 생각하시는 바를 알아차리고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사이에 하느님 세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세존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S6.2)라고 표현 되어 있다. 하느님이라고 번역되는 브라흐마가 등장하고 신통을 부리듯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신화적이고 초월적인 장면이 있다고 해서 배척한다면 경전을 읽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리로 판단하려고 한다. 또 한가지는 과학적 증거를 말한다. 자신의 깜냥과 과학적 잣대로 말했을 때 니까야는 읽을 것이 못된다. 초월적 이야기, 신화적 이야기, 신통에 대한 것을 빼 버리면 몇 개나 남을까? 오로지 인간 부처님에 대한 것만 추려 낸다면 몇 개 되지 않을 것이다.

경전은 빠짐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한다. 주석도 꼼꼼히 읽어야 한다. 어쩌면 경전읽기는 주석을 읽는 맛에 읽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경전을 읽다보면 이 니까야와 저 니까야가 서로 연계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니까야에서는 간략하게 설해져 있지만 저 니까야에서는 상세하게 설해져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니까야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화적 이야기, 초월적 이야기, 신통에 대한 이야기는 가르침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또한 가르침을 풍요롭고 풍성하게 해주어 읽는 맛이 나게 해준다.

초월적이고 신화적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위여부를 떠나서 그저그려러니 하며 중립적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래도 의심스럽다면 선정에 들어서 체험하면 될 것이다. 니까야에 따르면 네 번째 선정에서 신통이 열릴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초월적이고 신화적이라 하여 배척한다면 “선정에 들어보지 않았으면 그런 얘기 하지 말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부터 디가니까야읽기 대장정에

오늘부터 디가니까야읽기 대장정에 들어간다. 기간은 정해져 있다. 두 달 이내에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속도전을 해야 한다. 머리맡에 놓고서 자기전에 읽어야 하고 자고 나서도 읽어야 한다. 낮에도 시간 나면 읽어야 한다. 읽고 나서 감명 있는 것은 글로서 표현해야 한다.

경전을 읽다 보면 늘 글쓰기의 좋은 소재가 된다. 마치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사진을 찍어서 공유하고 싶듯이, 니까야에서 좋은 문구를 보면 이를 글로 써서 공유하고 싶어진다. 디가니까야 대륙 대장정을 떠난다.

 


2022-10-1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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