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내가 불리한 글도 쓰는 이유는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29. 08:30

내가 불리한 글도 쓰는 이유는


사람들은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을 꽁꽁 숨기고 사는 것 같다. 불리한 것은 숨기고 유리한 것은 드러내는 것 같다.

인터넷에 글을 쓴지 오래 되었다. 그렇다고 작가는 아니다. 블로그에 잡문을 쓰는 블로거이다.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쓴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을 갖추어 쓰려고 노력한다. 하나라도 건질 것이 있는 글이 되고자 한다. 때로 내면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블로그는 필명으로 썼다. 당연히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다. 익명으로 썼기 때문에 겁없이 썼던 것 같다. 그때는 가능하면 단점이나 불리한 것은 드러내지 않고 쓰고자 했다. 경전을 근거로 해서 쓰다 보니 약간은 신비화 된 것 같았다. 종종 "대체 누구냐?" "어떤 인간이냐?"라는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차나 한잔 하자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자신이 인사동 근처에 있는데 인사동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사람이 찾아 오는 것 아닌가?"라고. 당연히 가지 않았다.

글과 사람은 다른 것이다. 글의 내용을 인격으로 보면 실망하기 쉽다. 이런 이유로 내면을 드러내는 글을 종종 쓴다. 그런데 이런 글이 단점으로 작용해서 때로 악용되는 경우도 있다.

언젠가 어느 스님과 틀어졌다. 페이스북에서 스님의 글을 비판했는데 발끈한 것이다. 스님은 과거의 글을 문제 삼았다. 한시간도 앉아 있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맹비난 했다. 이에 가르치려고만 드는 꼰대기질이 있다고 반박했다.

꼰대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가르치려고만 드는 사람이 대표적이다. 마치 선생이 학생을 훈육하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꼰대라고 하면 교사, 교수, 강사, 연사, 법사, 목사, 신부, 스님이 연상된다. 주로 남 앞에 서는 사람들이다.

요즘 사람들은 꼰대라는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교육이나 강의와 같은 말이 떠올라 따분하게 보는 경향도 있다. 가르치고 훈계하고 지적하려는 사람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싫어함이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진정한 꼰대가 있을 것이다. 언행일치가 되는 사람이다. 낮에 말한 것과 밤에 행위가 다르다면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지행합일이 되는 사람이 진정한 꼰대이다. 언행일치가 되는 사람이 훈계한다면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2016
년의 일이다. 그때 전재성 선생 아파트 거실에서 니까야 공부모임이 있었다. 어느날 전재성 선생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행자가 있다고 했다. 김광하 선생을 말한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일치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김광하 선생은 알고 있었다. 2016 10월 즈음에 테라가타 출간회 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행합일의 행자라는 말을 듣자 찾아 보고 싶었다. 그래서 황학동에 있는 '사명당의 집'을 찾아 갔다.

김광하 선생은 작은 봉사단체를 이끌고 있었다. 이는 '작은 행복'이름이라는 봉사단체를 말한다. '작은 행복'에서는 을지로 굴다리 밑에서 노숙자들을 위한 저녁 한끼 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거노인들을 위한 반찬봉사를 하고 있었다. 또한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지원도 하고 있었다.

김광하 선생은 전재성 선생의 친구이다. 또한 후원자이자 편집자이기도 하다. 전재성 선생도 봉사활동에 참여 했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청계천 노숙자 봉사를 말한다. 이를 '따비'라고 했다.

따비는 작은 농기구를 말한다. 큰 농기구를 사용할 수 없는 모서리나 작은 땅을 경작할 수 있는 도구를 말한다. 그런데 일이년 봉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0년 넘게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강경에 무주상보시의 가르침이 있다. 주긴 주되 티 내지 말라는 것이다. 김광하 선생의 봉사단체 '작은 행복'에서는 티 내지 않고 주었다. 언론이나 매스컴에도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다. 지자체의 보조금이나 정부의 지원도 받지 않았다. 오로지 자발적 후원자들의 사비로 운영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무주상보시의 실천이라고 보았다.

전재성 선생의 얘기를 듣고 김광하 선생을 찾아 갔다. 황학동에 있는 '사명당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노숙자 봉사에 함께 나갔다. 이후 두 달 동안 매주 나갔다.

김광하 선생의 봉사단체 '작은 행복' 2017 3월에 회향되었다. 그러나 그때 두 달 동안의 체험은 강렬했다. 세상에 이런 삶도 있었던 것이다!

 


노숙자들에게 배식봉사를 했다. 백설기와 바나나가 든 봉지를 나누어 줄 때는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었다. 그때 자원봉사자 중에서 김열권 선생도 보았다. 영상으로 보다가 처음으로 인사 나누었다. 전재성 선생의 친구라고 했다.

을지로 노숙자 봉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는 천주교 단체에서 그 시간에 봉사하고 있다. 전재성 선생은 요즘도 종종 현장에 간다고 했다. 코로나 시기라서 마스크를 사가지고 가서 나누어 준다고 했다.

나도 꼰대가 되고자 한다. 말로만 하는 꼰대가 아니라 언행일치가 되는 꼰대, 지행합일의 꼰대가 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실천해야 할 것이다.

보시는 능력껏 하라고 했다. 능력에 따라 많이 할 수도 있고 적게 할 수도 있다.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보시에 대한 과보는 액수에 따라 차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적은 보시금액이지만 재벌이 보시한 것 이상의 공덕이 될 수 있다. 왜 그런가? 능력껏 보시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는 만큼 능력껏 쓰는 것이다.

매일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있다. 어떤 이는 글과 인격을 동일시하는 것 같다. 이런 오해를 깨기 위해 내면적인 이야기도 종종 쓴다. 단점이나 불리한 것도 쓰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다짐이다.

어제 좌선을 30분 밖에 하지 못했다는 글을 올렸다. 어떤 이는 한 수 가르쳐 준다며 수행코치 했다. 이미지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글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단점이나 결점 등 불리한 것을 쓰는 것은 극복해 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또 한편으로는 "나는 꼰대가 아니다."라는 선언이다. 이런 선언은 결국 "나는 학인이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모두 배우는 사람이다. 모든 번뇌가 소멸 되었을 때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공부할 것도 없다. 그 이전 까지는 탐, , 치가 남아 있기 때문에 오염원을 소멸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래서 단점이나 불리한 것도 드러내는 글도 쓴다.

어른이 되어야 한다.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머리가 희다고 해서 모두 장로가 아닌 것과 같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탐, , 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아이와 같다.


"
바라문이여, 태어난 이래 여든 살, 아흔 살, 백 살의 노인이라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속에서 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고뇌에 불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념에 삼켜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한다면, 그를 어리석은 장로라고 합니다."(A2.37)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육체적으로는 노년에 접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의 오염원에 지배 받고 있기 때문에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꼰대가 될 수 없다. 진정한 꼰대가 되려면 지행합일의 행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인터넷에 불리한 글도 쓰는 이유가 된다.


2022-11-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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