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백색의 거대한 루완웰리세야 다고바에 섰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2. 13. 22:42

백색의 거대한 루완웰리세야 다고바에 섰을 때

세이크리드 시티(Sacred Sity), 어느 여행서적에서 본 것이다. 신성도시라는 뜻이다. 왜 이런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성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보면 경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스리랑카의 고대도시 아누라다푸라가 그렇다.

어제 아누라다푸라 순례 했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자 어두워졌다. 적도 가까이 있어서일까 오전 6시에 해가 뜨고 오후 6시가 되면 해가 지는 것 같다. 아마 일년 열두달 거의 변함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둠이 깔렸을 때 아누라다푸라는 환상적이었다. 특히 루완웰리세야 다고바가 그랬다.

루완웰리세야 다고바는 아누라다푸라에 우뚝 서 있다. 마치 도시의 랜드마크처럼 사방 어느 곳에서도 다 보인다. 고대도시 밀림 어느 곳에서도 찬연하게 빛나는 흰 다고바를 볼 수 있다. 운전기사 가미니는 뷰포인트를 알려 주었다. 차를 멈추고 찍으라고 했다.

야간에 수 많은 사진을 찍었다. 멀리 보이는 것은 줌으로 확대하면 좀더 선명해진다. 갈수록 좋은 뷰포인트가 나왔다. 그때 마다 가미니는 차를 멈추고 찍으라고 했다. 한번은 호수에 비친 다고바를 찍었다. 최후로는 다고바 정면에서 가까이 보이는 장면을 찍었다. 줌으로 확대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고바 자체가 커다랗게 들어 온 것이다.

흰색으로 빛나는 성스러운 루완웰리세야 다고바를 가졌다. 만족한 사진을 얻자 뿌듯했다. 고생한 보람을 느끼는 듯 했다. 두고두고 간직할 작품을 건진 것 같았다. 신성한 고대도시 아누라다푸라가 이 한장의 사진에 다 들어 온 듯 했다.

루완웰리세야 다고바를 보고 또 본다. 볼 때마다 가슴이 뛰는 것 같다. 사진으로만 접했을 때도 그랬다. 그 때가 언제였던가? 아마 2000년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2007년으로 기억한다. 그때 블로그에 글쓰기가 물이 오를 때 였다. 악까까소 비구가 인터넷에 올린 루완웰리세야 다고바 사진을 보고 가슴이 마구 뛰었다. 거대한 백색의 다고바에 경배하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의 무리가 성스러워 보였다. "나도 저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라고 의문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나도 그들과 같이 흰 옷을 입고 다고바 앞에서 합장 했다. 꿈이 실현 된 것이다. 무려 15년만이다. 그 사이에 루완웰리세야 다고바는 나의 꿈이  되었다. 특히 청정도론을 접하고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누라다푸라는 청정도론의 고향이기도 하다.

청정도론에 푹 빠져 있다. 이 세상에 청정도론만한 논서가 없는 것 같다. 마치 불교 백과사전 같기도 하다. 이는 오부 니까야의 주석서로서의 성격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청정도론은 훌륭한 불교 수행지침서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미얀마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 법문을 보면 청정도론에 기반한 것이 많다. 이런 이유로 청정도론에 대해서 남방 테라와다불교의 부동의 준거틀이라고 말한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청정도론을 열어 본다. 이제까지 내가 의문하고 있었던 것은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대한 청정도론은 나에게 있어서 금과옥조와 같다. 2007년 청정도론을 처음 접한이래 읽고 또 읽었다. 이러한 청정도론의 고향이 아누라다푸라이다.

청정도론은 5세기에 붓다고사에 의해 집필 되었다. 그는 스리랑카 불교 부흥기에 인도 대륙에서 건너왔다. 또한 그는 삼장에 통달한 명사였다. 마하비하라에서 특별히  초대해서 온 것이다.

붓다고사는 빠알리 니까야에 대해서 새롭게 주석했다. 그동안 싱할리어로 기록되어 있었던 니까야를 빠알리어로 다시 주석한 것이다. 마하비하라에서는 왜 이렇게 한 것일까? 그것은 대륙의 새로운 사조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도 대륙에서는 새로은 사조의 불교가 일어났다. 마하야나 불교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사조는 변화무쌍했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는 공인된 불교를 지켜 내고자 했다. 그것은 제3차결집된 불교를 말한다. 아소까 왕 당시에 정화된 불교이기도 하다. 빠알리 삼장으로 완성된 불교이다.

아소까는 전세계에 담마사절단을 파견했다. 이는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의미한다. 칼과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부처님 가르침으로 전세계를 정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아소까 비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아소까는 담마비자야(Dhammavijaya)를 천명했다. 담마로 세계를 정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비문에서 "부처님의 담마야말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평화를 가져온다."라는 문구로 잘 알 수 있다. 그 결과 인도 최남단 스리랑카에도 부처님 가르침이 들어오게 되었다.

스리랑카 불교는 역사가 깊다. 제3차결집된 공인불교가 기원전 3세기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섬의 특성이 있어서일까 정통불교는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아누라다푸라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다고 하자.

그때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왕이나 왕의 대신들에게 보고할 것이다. '왕이시여, 마땅히 아셔야 합니다. 저는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습니다. 왕이시여, 그 도시를 다시 세우십시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왕이나 왕의 대신들이 그 도시를 다시 세우게 해서 그 도시가 나중에 번영하고 부유해지고 사람들이 몰리고 인구가 많아져서 성장과 발전을 이루듯이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올바로 깨달은 분들이 거닐던 옛 성과 옛 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승들이여, 전생에 올바로 깨달은 분들이 거닐던 그 옛 길과 옛 거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덟 가지의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마음새김, 올바른 집중의 길이다. 이것이 수행승들이여, 과거의 올바로 깨달은 분들이 거닐던 그 옛 길과 옛 거리이다. 나는 그 길을 따라 갔다. 그 길을 따라 가서 나는 늙고 죽음을 깨달았고 늙고 죽음의 원인을 깨달았고 늙고 죽음의 소멸을 깨달았고 늙고 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깨달은 것이다."(S12.65)

아마 2010년대 초반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 BTN(불교TV) 사이트에서 스리랑카 아상가 교수의 사상제를 들었다. 아상가 교수는 부처님의 정각에 대해서 고대도시를 발견한 것을 비유로 들었다.

부처님의 설법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유가 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 '도시의 경'(S12.65)을 말한다. 그것은 고대도시와 그곳에 이르는 길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숲에서 어떤 길을 발견하여 그길을 따라 가보니 마침내 그 도시에 이르러 기쁨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그는 길을 발견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그곳에 이른다. 즐거움을 만끽한 뒤 돌아와 다른 이들에게 그곳에 이르는 지도를 전한다. 그런데 니까야에 따르면 과거에 츨현 했던 수많은 부처님들도 똑 같은 길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기쁨이 있는 고대도시를 발견한 것이다.

언젠가부터 아누라다푸라를 고대도시로 생각했다. 경전 속에 나오는 잃어버린 도시를 말한다. 실제로 아누라다푸라는 외세에 의해서 오랜 세월 폐허가 됐었다. 복구된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 빠알리삼장의 고향이자 동시에 청정도론의 고향은 그 옛날 풍요로웠던 시절의 고대도시처럼 여겨진다.

오늘 마침내 고대도시에 우뚝 섰다.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백색의 거대한 루완웰리세야 다고바에 섰을 때 붓다고사 당시를 떠 올렸다. 그때도 수행승들은 이 탑에 경배 했을 것이다. 그 많던 수행승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는 오래지 않아, 그러기 위해 양가의 자제들이 당연히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그 위없는 청정한 삶을 바로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그는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곧바로 알았다."(S6.3)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정형구이다. 출가를 이룬 목적이 잘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 당시에 양가집 자제들이 부처님 설법을 듣고 앞다투어 출가 했는데 아라한 선언을 함으로써 출가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누라다푸라에도 수천, 수만명의 출가승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출가목적이 달성 되었을까? 귀한 집 자식들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해서 모두 별이 되었을까? 부처님 가르침대로 실천했다면 모두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되었을 것이다.

다고바에는 부처님의 유체가 모셔져 있다. 부처님 사리가 그것이다. 거대한 불탑은 일종의 사리탑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불교인들은 불탑 보기를 부처님 보듯 한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 왔다.  스리랑카 불자들이 흰 옷 입고 경배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누라다푸라,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백색의 거대한 다고바를 보면 고대도시에 와 있는 것 같다. 저녁 해질무렵 석양의 다고바는 장엄해 보인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렸을 때 찬연히 빛을 발하는 다고바는 신비스럽다. 나는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

2022-12-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