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정말 기리위헤라에 왔을까?
스리랑카에 언제 불교가 전래 되었을까? 공식적으로는 기원전 250년이다. 아소까대왕 당시 제3차 결집된 공인불교가 전래 된 것이다. 그러나 비공식적 전래 이야기도 있다.
스리랑카 역사서 마하왐사가 있다. 마하왐사에 따르면, 부처님은 부처님 재세시에 이미 세 차례 스리랑카를 방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화와 전설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사람들 입에 회자 되면 전설이 된다. 과거 프로야구 초기시절 맹활약 했던 선수들에게 '전설'이라고 칭호를 붙여 주는 것과 같다. 세월이 흐르면 신화가 된다. 단군신화가 좋은 예이다. 부처님의 스리랑카 방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신화라고 해서 모두 허구일까? 요즘 불교TV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자현스님은 부처님의 스리랑카 방문에 대해서 '개구라'라고 말했다. 평소 입이 거칠기로 소문난 스님의 입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신화는 정말 허구일까? 신화는 누군가 소설처럼 만들어낸 것일까? 그러나 전설없는 신화는 없다. 또한 실제 있었던 사건에 기반하지 않은 전설은 없다. 이렇게 본다면 신화는 실제 있었던 사건에 기반한다. 부처님은 정말 스리랑카에 왔을까?
순례팀은 스리랑카 동남쪽으로 갔다. 왜 그쪽으로 가는 것인지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곳에는 혜월스님이 출가한 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기리위헤라(Giriwehera)이다. 여기서 '기리'는 '소의 우유처럼 하얕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기리위헤라는 작은 절인줄 알았다. 그러나 도착해서 보니 규모가 매우 큰 절이었다. 무엇보다 역사가 오래 되었다. 부처님이 스리랑카에 세 번 왔는데 그 중에 한번 이 절에 왔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불탑 앞에 있는 설명문에도 기록되어 있다.
기리위헤라, 부처님이 방문한 절이다. 그럼에도 내가 가지고 있는 스리랑카 소개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검색창에 'Giriwehera'를 키워드로 검색해 보아도 잘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여행사의 스리랑카순례 패키지여행 일정에도 들어가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곳에 온 것은 순전히 혜월스님 출가절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차로 이동하면 혜월스님과 얘기를 나눈다. 혜월스님은 스리랑카 사람이지만 한국사람보다 한국말을 더 잘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독학으로 배웠다고 한다.
혜월스님이 처음 한국에 온 것은 1984년이다. 한국에서 8년 있었다. 스님은 스리랑카에서 1977년에 출가했다. 출가한지 7년 되었을 때 한국에 온 것이다. 그때 당시 송광사에는 외국인 스님들도 있었다. 그런데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다고 한다. 한국스님들이 영어를 할줄 몰라서 말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혜월스님은 한국말을 배우기로 작정했다. 연세대 한국어 학당에 가서 책을 샀다고 한다. 또한 종로에서 영영한 사전을 샀다고 한다.
스님은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웠다. 3개월이 지나자 어느 정도 소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외국인 스님들은 연세대 한글학당 다니면서 공부 했으나 혜월스님은 독학으로 깨친 것이다.
혜월스님은 언어 천재인 것 같다. 출가전에 독일어를 깨쳤다고 한다. 출가한 후에는 한국을 비롯하여 외국에서 살았는데 그때 마다 외국어를 깨쳤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할줄 아는 말은 싱할리어, 영어, 한국어, 독일어, 스페인어, 힌두어, 산스크리트어, 빠알리어라고 한다. 태국에도 2년 살았기 때문에 태국말도 조금 할줄 안다고 한다.
스님은 전세계를 돌아 다녔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한국뿐만 아니라 홍콩, 대만, 호주에서도 각각 2년 살았다. 지금은 미국 엘에이(LA)에 살고 있다. 스님은 경전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빠알리어 원문으로 되어 있는 경전과 영역된 경전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캔디 BPS에서 두꺼운 영역본 수타니파타를 샀다.
불자들은 스님을 보면 궁금해 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것은 출가에 대한 것이다. 혜월스님의 출가가 궁금했다. 그래서 "스님은 왜 출가하셨어요?"라고 물어 보았다. 대답이 궁금했다. 맛지마니까야에서 본 랏타빨라 존자의 출가이유를 기대했다. 그러나 의외로 한 수행자를 보고서 출가했다고 한다.
스님이 출가한 절은 기리위헤라이다. 기리위하라가 아니다. 위하라가 붙으면 스님이 머무는 절을 의미하고, 위헤라가 붙으면 불탑이 있는 절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래서일까 기리위헤라에는 거대한 백색의 다고바가 있다.
스님은 출가한 날 에피소드도 알려주었다. 출가한날 그날에 스리랑카 대통령이 왔다는 것이다. 아마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마침 출가한 날 그날에 스리랑카 대통령이 부처님이 한번 방문했다는 기리위헤라를 찾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 스님은 "그거 역사책에 안나와요?"라며 묻는다. 물론 농담이다. 스님은 유머러스한 면이 있다.
스님은 몇 살에 출가했을까? 스님이 말한 것을 종합해서 추론해 보니 21살 때인 1978년에 출가한 것 같다. 스님은 이번 순례에서 출가절을 찾은 것이다. 그것도 한국 순례자들과 함께 찾았다.
기리위헤라에는 거대한 보리수가 있다.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원조 보리수보다 더 큰 것 같다. 스님에게 수령을 물으니 1,500년 됐을 것이라고 한다. 스님은 보리수 앞에서 기념촬영 했다. 스님이 출가했을 때 바로 그 보리수이다.
기리위헤라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구역은 보리수 구역이고, 또 한구역은 불탑 구역이다. 두 구역사이에는 수백미터에 달하는 대로가 있다. 기리위헤라는 생각보다 꽤 큰 절이다.
보리수 구역에는 불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힌두교도 있다. 보리수 바로 앞에는 힌두 사당이 있다. 이에 대해서 스님은 한국의 산신각이나 칠성각 정도의 개념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한국 절에 가면 법당이 중심이다. 불자라면 법당에 가서 삼배해야 예의 있는 불자로 알려져 있다. 스리랑카는 어떨까?
스리랑카는 우리와 다르다. 법당에 들어가지 않는다. 야외에 있는 보리수와 불탑이 숭배 대상이다. 그래서 보리수를 오른쪽으로 한바퀴 돌고, 불탑도 오른쪽으로 한바퀴 돈다.
순례팀은 보리수를 한바퀴 돌고 불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불탑은 수백미터 대로 끝에 있다. 불탑에 가까이 갈수록 대로 양 옆에는 꽃 파는 가게가 열지어 있다.
스리랑카 불자들은 꽃공양을 한다. 공양단에는 꽃만 보인다. 향이나 초 등 다른 것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꽃이라도 한송이 들고 가는 것이다.
꽃 파는 노점에서 꽃을 샀다. 스리랑카 국화인 보라색 수련을 샀다. 이밖에도 스님은 흰 색의 작은 꽃도 샀다. 그런데 꽃 파는 젊은 여인들은 한결같이 아름답고 미인이라는 것이다. 가뭇한 피부가 건강해 보인다.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을 때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불탑은 점점 다가 온다. 그 크기가 아누라다푸라 불탑만하다. 12월 16일은 금요일로 평일 오후이었음에도 흰 옷 입은 순례자들이 많았다. 특히 나이 든 노년의 여성불자들이 많았다. 주말과 뽀야데이날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부처님은 정말 스리랑카에 왔을까? 어느 입이 거칠기로 유명한 스님처럼 '개구라'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반신반의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대양 항해와 관련된 게송도 있다. 또한 주석서에는 인연담도 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기원전 500년 경에도 벵갈만에서 스리랑카까지 대양항해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 입멸후 250년 후에 아소까 대왕이 담마사절단을 벵갈만에서 출항시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이 바다에 대해 비유를 든 것이 많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은 바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스리랑카 방문을 배제할 수 없다.
기리위헤라는 스리랑카 동남부에 있다. 동남부에는 인도 벵갈만과 연결되는 항로가 있다. 스리랑카 역사서에는 부처님 방문이 기록되어 있다. 기리웨하라 안내 표지판에는 돌에 새겨서 명문화 해 놓았다. 부처님은 정말 이곳 기리위헤라에 온 것일까?
2022-12-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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