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코트 대령의 수계현장 비자야난다에서
참으로 마음이 뿌듯했다. 그리고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했다. 그것은 남들이 하지 않는, 하지 못하는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올코트 대령이 오계를 받은 사원을 방문한 것이다. 여기서 대령은 마지막 직함을 의미한다. 민간인으로 온 것이다.
스리랑카 성지순례팀은 갈레포트를 보고 난 후에 다음 행선지로 떠났다. 올코트 대령 수계지를 방문하고자 한 것이다. 스리랑카 불교의 부흥과 관련된 올코트 대령의 행적을 찾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이번 스리랑카 순례에서 가장 하일라이트일지 모른다.
갈레 시내로 들어갔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로터리 중앙에 동상이 하나 있었다. 그 동상이 올코트 것인줄 알았다. 더구나 동상이 있는 곳에는 불탑이 있는 사원이 있었다. 이곳이 올코트가 오계 받은 곳인줄 알았다.
사원에 들어가 보았다. 너른 강당은 마치 교실 같았다. 이곳저곳에서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담마스쿨이라는 명칭과 잘 맞는 것 같았다.
김형근 선생은 의문을 가졌다. 정말 이곳이 맞는지 물어 본 것이다. 담마스쿨 선생은 수계받은 곳은 다른 데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사원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곳은 비자야난다(Vijayananda)라는 이름을 가진 사원이다.
비자야난다를 찾아 갔다. 네비에도 잘 잡히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물어서 접근해 갔다. 로터리에 이르자 중앙에 동상이 하나 보였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기골이 장대한 형상의 동상이 있다. 한눈에 올코트 대령 동상으로 파악 되었다. 이전 로타리에서 본 동상은 수염이 없었다.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근대 스리랑카 불교운동의 시작이자 오색불교도의 설계자인 올코트 대령 동상을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이다.
올코트 대령 동상은 로터리 중앙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동상 아래에는 설명문이 있다. 싱할리어로 되어 있어서 읽을 수 없다. 설명문에 1880.5.17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 온다. 이는 올코트 대령이 이곳 스리랑카에 와서 최초로 오계를 받은 날자를 의미한다. 설명문 아래에 2516과 1973.5.13이라는 숫자가 눈에 띈다. 아마도 동상을 건립한 연대와 날자일 것이다. 동상을 발견하자 기뻤다. 마치 큰 일을 해낸 것 같았다.
스리랑카 성지순례가면 추천코스가 있다. 주로 유적 위주의 순례가 되기 쉽다. 그러나 뚜렷한 목적을 가진 순례에서는 남들이 가보지 않는 곳도 대상이 된다. 올코트 대량이 수계받은 사원도 바로 그런 곳에 해당된다.
근처에 사원이 있을 것이다. 운전기사 가미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서 마침내 사원 입구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그토록 찾고 싶었던, 그토록 한번 가보고 싶었던 사원에 온 것이다.
사원은 입구에서부터 예사롭지 않다. 도심에 있기때문에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중형 사이즈는 되었다. 사원은 갖출 것을 다 갖춘 것 같다. 그것은 불탑과 보리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원은 한적하다. 우리 순례팀만 있다. 도심에 있어서일까 건물이 여러 동 들어차 있다. 마치 작은 대학 캠퍼스를 연상케 한다. 순례자들이나 관광객이 찾는 사원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사원 관리인은 우리 일행을 주지스님이 있는 건물로 안내 했다. 주지스님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사전에 연락도 하지 않고 간 것이다. 불쑥 찾아 간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환대해 준 것이다.
주지스님은 나이가 많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지만 80은 넘은 것 같다. 깡말라서 뼈가 드러나 보인다. 학구적 인상이다. 또한 부드러운 이미지이다. 손님을 자애롭게 대한다.
주지스님은 올코트 대령이 쓴 일기를 보여 주었다. 책은 오래 전에 츨판된 것 같다. 문고판 사이즈로 꽤 두껍다. 책의 표지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올코트 대령 사진이 있다. 책의 제목은 'OLD DIARY LIVIES'이다.
책은 대단히 낡았다. 수십년 된 것 같다. 시중에서 이 책을 살 수 있을까? 검색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절판된 것이라면 새로 발간해야 할 것이다.
주지스님은 대단히 친절하고 자애로운 것 같다.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고 갑자기 들이 닥친 일행에게 사원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법당도 그런 것중의 하나이다.
스리랑카 순례 다니다 보면 법당 들어갈 일이 별로 없다. 불탑과 보리수가 주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탑과 보리수를 도는 행위로 끝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법당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주지스님과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법당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중앙에 홀이 있다. 홀을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복도식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법당은 신심을 내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탄생에서부터, 성도, 초전,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갖가지 조형물과 벽화로 장식해 놓았기 때문이다.
주지스님은 우리를 특별한 벽화로 안내 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올코트 대령과 그의 부인이 둘이서 수계를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부처님 일대기 벽화와 함께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곳 비자야난다 사원이야말로 올코트 대령 부부가 수계를 받은 확실한 장소임을 증명하는 것 같다.
주지스님은 우리를 다음 코스로 데려 갔다. 그 곳은 강당건물이다. 강당 안에 들어가니 벽화속에 있는 바로 그 강당이다. 올코트 대령 부부가 수계를 받던 바로 그 강당으로 인도한 것이다. 이는 벽화 속에서 본 세 개의 문의 형태로 확인 되었다. 벽화에서 본 문 세 개가 강당에도 있었던 것이다!
주지스님은 사원 투어를 시켜 주었다. 그리고 시자를 시켜서 차를 대접하게 했다. 일행은 길건너 유치원 건물 2층에 있는 스님들 숙소에 갔다. 그곳에서 차를 마셨다. 처음 찾아 간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환대한 것 같다. 그런 환대는 아마도 혜월스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어렵게 찾아 왔다. 우여곡절도 겪었다. 누구도 찾아 갈 생각하지 않는 곳을 찾아 왔다. 그것도 물어물어 찾아 왔다. 이에 사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번 순례 목적은 달성되었다. 누구나 아는 이름 있는 성지를 가는 것도 좋지만 꼭 가볼만한 곳에 가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 곳 중의 하나가 올코트 대령부부가 수계받은 비자야난다 사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원을 방문하고 나자 가슴이 뿌듯했다. 마치 큰 일을 해낸 것 같다. 남들이 가 볼 생각을 안하는 곳,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모르는 곳에 가 본 승리감이다.
만약 그때 김형근 선생이 물어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엉뚱한 곳을 그곳이라고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순례팀에 행운이 있어서일까 제대로 찾아 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올코트 대령의 수계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스리랑카 근대불교부흥운동의 신호탄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세계에 불교를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왜 그런가? 올코트 대령의 수계는 스리랑카 출신 다르마팔라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다르마팔라는 스리랑카 근대불교부흥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다. 이는 올코트 대령의 수계와 관련이 있고 더 나아가 파나두라 논쟁과도 연결된다.
스리랑카는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이전에는 네덜란드가 들어 왔고 더 이전에는 포르투갈이 들어 왔다. 영국 식민지 시절 스리랑카 불교는 위축되었다. 이를 일거에 만회 해준 사건이 있었다. 파두나 논쟁에서 불교가 기독교에 승리한 것이다.
파두나 논쟁의 승리는 올코트 대령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올코트 대령은 스리랑카에서 수계받게 되었다. 스리랑카에서 올코트 대령의 활약은 다르마팔라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1893년 시카고에서 세계종교회의가 열렸다. 그때 다르마팔라는 스리랑카 대표로 참가했다. 그때 다르마팔라는 불교를 알렸다. 이후 미국에서 불교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 회사 다닐 때 전자제품 개발을 했었다. 그때 회자되던 말이 있다. 그것은 "미국에서 상품경쟁력을 갖게 되면 전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 된다."라는 말이다. 미국은 상품경쟁이 치열하기 미국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품질이 뛰어나야 함을 말한다. 종교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르마팔라는 불교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그 결과 미국에서 불교 붐이 일어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 가까운 원인으로 올코트 대령의 수계가 있었고, 먼 원인으로는 파나두라 논쟁에서 구나난다 스님의 승리가 있었던 것이다.
스리랑카 근대불교부흥운동은 세 가지 사건에 기반한다. 구나난다 스님이 1873년 파나두라 논쟁에서 승리한 것, 파나두라 논쟁에서 승리한 것에 자극받아 올코트 대령이 1880년에 스리랑카에서 수계한 것, 올코트 대령의 활동에 영향받아 다르마팔라가 1893년 시카고 종교회의에서 연설한 것을 들 수 있다.
불교는 승리의 종교이다. 불교가 왜 승리의 종교인가?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모든 외도의 견해에 대해서 연기법으로 논파한 것이다. 파나두라 논쟁에서 승리가 우연이 아님을 알수 있다.
파나두라 논쟁의 승리로 올코트 대령이 스리랑카에 오게 되었다. 이후 스리랑카에서는 본격적인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수계현장이 바로 비자야난다 사원인 것이다. 비자야난다는 '승리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비자야가 승리를 뜻하는 빠알리어이고 난다는 즐거움 또는 기쁨이라는 뜻이다.
어제 비자야난다 사원을 방문하고 나니 기뻤다. 그것은 승리의 기쁨이다. 못 찾을 것 같았는데 찾은 것에 대한 기쁨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처님의 승리에 대한 기쁨이다.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이 항상 나에게 임하기를!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이 항상 그대에게 임하기를!
2022-12-1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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