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켈라니안 사원에서 본 보리수 신앙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2. 20. 18:51
켈라니안 사원에서 본 보리수 신앙

 

스리랑카 성지순례 마지막날이다. 오늘 첫번째 일정은 켈라니안 사원이다. 콜롬보에서 가장 큰 사원이라고 한다. 도착해서 보니 그 크기를 알수 있다.
사원에 들어 갈 때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맨발이 기본이다. 성소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양말도 벗어야 한다. 흙길을 맨발로 걸어 간다.
사원에 갈 때는 꽃을 준비해야 한다. 꽃공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사원 앞에는 꽃가게가 줄지어 있다. 주로 연꽃이다. 다섯 송이에 200루피가량이다. 우리 돈으로 500-600원 정도이다.
사원에 올라 갔다. 먼저 거대한 불탑이 위용을 자랑한다. 스리랑카에서만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산치대탑 모습이다.
스리랑카 불교는 서북인도 전통을 이어 받았다고 한다. 산치대탑이 있는 웃자인 지역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기원전 3세기에 받아 들인 불교전통이 고스란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고바라고 불리우는 불탑도 이에 해당된다. 산치대탑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계단을 올라서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 졌다. 흰 옷 신도들로 도량이 가득한 것이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것 같다.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다. 깔개에 앉아 있기도 하고 맨땅에 앉아 있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합장하고, 어떤 이들은 합장하며 암송을 한다. 어떤 이들은 가만 앉아 있는다. 모두 경건한 모습이다.
사원에는 엄청나게 큰 보리수가 있다. 보리수 앞에는 불상이 있다. 사람들은 보리수와 불상에 공양하기 위해서 긴 줄을 섰다. 줄은 보리수를 한바퀴 감아 돌았다.
보리수에 긴 줄이 형성된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성수로 보리수에 물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물단지를 하나씩 들고 서 있다. 자신의 차례가 돌아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사원 한켠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다. 기름 램프를 말한다. 우리나라 초공양을 연상케 한다. 보리스나 불탑이나 법당 안에서는 불을 볼 수 없다. 지정된 장소에서만 램프를 켤 수 있다.
사원에 향도 있을까? 놀랍게도 향이 있다. 법당 입구 멀리 떨어진 곳에 딱 한 곳 있다. 이번 순례기간 중에 수많은 사원을 방문했지만 향로가 있는 곳은 이곳 켈라니언 사원이 유일하다.
열기가 대단하다. 그러나 차분하다.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를 즐기려는 듯 하다. 마치 공원에 간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 같다. 언제까지고 앉아 있으려는 것 같다. 한번 휘리릭 둘러 보고 서둘러 떠나버리는 외국인들하고 태도가 다른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 그것은 명상하는 모습이다. 거룩하고 성스러워 보인다. 명상 못지않게 아름다운 모습은 공양하는 모습이다. 캘라니안 사원에서 공양하는 모습도 그랬다.
혜월스님에게 물어 보았다. 스리랑카 불자들은 공양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문의한 것이다. 덧붙여서 건강, 학업, 사업, 치유를 위한 것이 아닌지 물어 보았다.
스님은 건강, 학업, 사업, 치유를 위한 공양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세계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다만 바라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님은 "공덕이 되는 공양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불교인에게는 두 가지 삶이 요청된다. 하나는 꾸살라행이고, 또하는 뿐냐행이다. 이를 각각 선행과 공덕행이라고 말할수 있다. 전자는 번뇌를 소멸하는 삶으로서 윤회를 끊내는 수행자의 삶이 이에 해당된다. 후자는 번뇌가 있지만 윤회하는 삶속에서 공덕이 되는 재가 신도의 삶이 이에 해당된다. 혜월스님은 후자를 말한 것이다.
보리수를 한바퀴 돌았다. 다음으로 불탑을 한바퀴 돌았다. 거대한 흰 불탑에는 사방에 공양단이 마련되어 있다. 공양단에는 반드시 불상이 있다. 사마디 불상이다. 삼매에 든 부처님의 모습이다. 사마디 불상은 보리수에도 있다. 보리수 사방에는 사마다 불상이 있다. 그래서 보리수와 불탑에 공양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불상에 공양하는 것이 된다. 굳이 법당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법당에는 언제 들어가는가? 그것은 와불에 공양할 때 들어간다. 그래서인지 스리랑카 법당에는 와불이 반드시 있다.
불단에는 꽃으로 가득하다. 꽃 이외에는 일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연꽃이다. 스리랑카에서 국화는 수련이다. 특히 보라색 수련을 말한다. 이 밖에도 수많은 갖가지 꽃이 있다.
대가를 바란다면 기도가 될 것이다. 큰 돈을 내고 소원성취되기를 바란다면 거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연꽃 한송이 올려 놓고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면 불공이 될 것이다.
불공을 붓다뿌자라고 한다. 부처님의 아홉 가지 덕성을 새기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서 혜월스님은 불공드리는 것에 대해서 부처님의 마음과 같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불공은 기도가 될 수 없다. 거래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불탑을 한바퀴 돌고 법당에 들어 갔다. 법당은 장대한 석조로 되어 있다. 석조법당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성소는 크게 짓는지 모른다. 가톨릭 성당을 보면 알수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위축되게 하고 경외감을 갖게 만든다. 켈라니안 법당도 그런 것 같다.
마치 동굴에 들어가는 것 같다. 대낮임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캄캄하다. 불상은 구중궁궐처럼 깊숙한 곳에 있다. 사람들은 꽃공양을 올리고 불공을 드린다. 꽃이 없으면 따로 마련된 보시함에 지폐를 넣는다.
법당은 큰 건물 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방이 있다. 와불도 있고 사리함도 있다. 그러나 머무는 기간은 짧다. 짧게 공양하고 지나간다.
보리수 옆에 강당이 있다. 운동장처럼 너른 강당에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있다. 여러 무리가 모여 있다. 모두 흰 옷을 입었다. 아마도 담마스쿨일 것이다.
혜월스님에 따르면 주말만 되면 사람들이 몰린다고 한다. 보름마다 한번씩 있는 포살날에도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발디딜 틈도 없이 많다고 한다.
켈라니안 사원은 일요일 이른 오전임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관광객처럼 한번 휘리릭 둘러보고 떠나는 사람들은 아니다. 불공을 드리고 법문을 들으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것이 스리랑카 불교의 힘일 것이다.
켈라니안 사원에는 세 가지 성소가 있다. 보리수와 불탑과 법당을 말한다. 어느 것이 중요도가 높을까? 이날 열기로 보았을 때는 단연 보리수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다음은 불탑이다. 법당은 세 번째이다.
스리랑카에는 어느 사원에 가든지 보리수가 있다. 스리랑카 불교에서 보리수는 부처님을 상징한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불상시대 때는 보리수가 부처님이었다. 이런 전통은 지금까지 내려 오고 있다.
스리랑카 불자들에게 보리수는 신앙의 대상이다. 이날 켈라니안 사원에서도 보리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물단지를 들고 긴 줄을 섰다. 그들은 왜 물단지를 들고 서있을까?
물단지는 보리수에 물을 주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의 상징에 물을 주기 때문에 성수가 된다. 이 때 성수는 생명수와도 같다. 보리수는 생명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서는 불탑보다도 법당 불상보다도 보리수가 우선이다. 왜 그런가? 보리수는 생명이 있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사원에 보리수가 있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 있는 것과 같다.
보리수는 분양된다. 보리수가 자라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널리 퍼지는 것과 같다. 보리수를 잘 보살피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수호하는 것과 같다.
스리랑카불교에서 보리수는 깨달음의 나무로 그치지 않는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원에 보리수가 있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살아 있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이 널리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켈라니안 사원에 긴 줄이 형성되었다. 줄은 보리수를 감아 돌았다. 손에는 성수가 담겨 있다. 보리수에 물을 주는 행위는 보리수를 살리는 행위일뿐만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이 널리 퍼져나가게 하는 행위와 같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공덕이 어디 있을까?
2022-12-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