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아누라다푸라 유적에서 익숙한 느낌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2. 24. 09:08

아누라다푸라 유적에서 익숙한 느낌을

 

 

현재시각 748, 아직도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날은 훤하게 밝았으나 해는 아직 저 산아래 있다. 조만간 찬란한 빛을 발할 것이다.

 

날씨가 무척 춥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영하 10도 이하인 것 같다. 오늘 토요일임에도 걸어서 일터로 갔다. 가죽장갑을 꼈지만 손마디가 시려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갔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남쪽나라를 생각하게 된다. 따뜻한 이미지의 남국을 말한다. 스리랑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주에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는 상하의 나라이다. 항상 여름의 나라라는 말이다. 자료에 따르면 매월 날씨가 28-30도라고 한다. 이런 날씨는 하와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유럽사람들이 자주 찾는다고 있다.

 

하와이는 세계적인 휴양지이다. 미국사람들이나 일본사람들이 즐겨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유럽사람들에게 하와이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유럽사람들은 하와이보다는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스리랑카로 가는 것 같다.

 

12월의 스리랑카는 어떨까? 최상의 날씨였다. 마치 우리나라 초여름 날씨 같았다. 건기이어서인지 비는 거의 오지 않았다. 하늘은 푸르고 산하대지는 온통 초록의 세상이었다. 마치 청정낙원같았다.

 

스리랑카에는 산업시설이 거의 없다. 자동차로 스리랑카를 일주하다시피 했는데 산업단지를 보지 못했고 공장도 거의 보지 못했다. 공장은 딱 한번 보았다. 남쪽 갈레 시 근처 해안가에 있는 시멘트공장이 그것이다.

 

스리랑카는 무엇으로 먹고 살까? 다녀 보니 답이 나온다. 스리랑카는 농업으로 먹고 산다. 인구의 대부분은 농촌에서 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경작되지 않은 논이 수두룩 하다는 것이다. 농사짓는 땅보다는 밀림이 훨씬 더 많다.

 

열대나 아열대 지방에서는 이모작이나 삼모작을 한다고 말한다. 스리랑카도 그런 것 같다. 한쪽에서는 벼가 익어가서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벼가 자라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다. 일년에 이모작, 삼모작이 가능한 것이다.

 

식량이 자급자족되면 살만할 것이다. 제조업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스리랑카에는 공장을 보기 힘들다. 산업시설이 없어서인지 도로도 거의 대부분 왕복 2차선이다. 공장도 없고 산업시설도 없어서인지 국토는 매우 청정해 보인다.

 

한국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기후에 있어서도 극과 극이다. 겨울에는 영하로 뼈속까지 춥다. 여름에는 열대야가 있어서 잠을 이루기 힘들다. 이렇게 극과 극이 있어서인지 사상적으로도 극과 극이 있다.

 

요즘 여유 있는 사람들은 태국 치앙마이로 달려 가는 것 같다. 치앙마이로 한달살이 또는 두달살이 떠나는 것이다. 추운 겨울을 피해서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겨울 한철 나고자 하는 것이다.

 

유럽사람들은 스리랑카에서 한달살이, 두달살이 하는 것 같다. 이는 스리랑카가 영국식민지 시절부터 유럽의 휴양지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날씨가 일년열두달 28-30도를 유지하고 있다면 한달살이가 아니라 일년살이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리랑카에도 구법승이 왔었다. 이는 법현스님의 불국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아마 전세계에서 수많은 구법승들이 왔었을 것이다. 구법승들이 스리랑카에 온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전히 보전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의정스님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스님도 스리랑카에 왔었다고 한다. 그런데 스리랑카에서 계를 받았다는 사실이한다. 스리랑카 상가의 일원으로 산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고구려스님은 귀국했을까?

 

스리랑카의 12월 날씨는 우리나라 초여름 날씨와 같다. 대체로 쾌적한 날씨이다. 열대야도 없다. 그런데 일년 열두달 이런 날씨라는 것이다. 정말 이런 날씨라면 천국이나 다름 없다. 그 고구려스님은 아마도 스리랑카에서 일생을 마쳤을 가능성이 높다.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 순례 했을 때의 일이다. 아비야기리승원 유적에 이르렀을 때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여러 유적 중에서 15번 보리수 사원(Bodhi-tree Shrine) 유적에 이르렀을 때이다.

 

 

보리수 사원 유적에는 중앙에 법당터 유적이 있다. 뒷편에는 석불이 하나 있는데 팔이 하나 잘려져 나갔다. 이 유적에 대한 안내문을 보니 “This is most ancient Bodhi-tree Shrine of the Abhayagiri monastery as reported by the Chinese monk Fa-hien, who visited Sri Lanka in 5th century A.D.”라고 쓰여 있다. 5세기에 법현(Fa-hien) 스님이 이곳을 다녀간 후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법현스님이 다녀 갔을 때는 오늘날 보는 것처럼 폐허는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번영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안내문을 보면 “The Budda images and Vajrasanas(Sacred Seats) found around the Bodhi-tree, and the remains of for construction phases from the first century B.C. are visible here.”라고 쓰여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불상과 금강좌가 보리수 주변에 있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어떤 유적은 기원전 1세기 것도 있다라는 것이다.

 

 

법현스님은 불국기에서 이곳 아비야기리승원에 와서 본 것을 기록했다. 그때 본 것이 바로 보리수였다는 것이다. 그 보리수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보리수였던 것이다. 아마 묘목을 가져 온 것이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보리수 네 방향으로 불상이 있는데 이를 금강좌 (Vajrasana)라고 했다.

 

이번에 스리랑카 순례에서 아비야기리승원 구역에서 보리수 사원 유적을 보았다. 법현스님의 기록대로라면 보리수가 있어야 하고 네 기의 불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보리수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네 기의 불상 중에서 팔이 잘린 한기의 불상만 남아 있다.

 

 

팔이 잘린 불상은 금강좌에 앉아 있다. 불상의 얼굴은 약간 훼손되었다. 전형적인 사마디형 불상이다. 이 불상을 보자 가슴이 울컥했다. 그리고 어디서 본 듯 익숙했다.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불족을 말한다. 유적지에는 부처님 발바닥 모양이 커다랗게 바위에 조성되어 있었다. 이런 것들을 보자 순간적으로 혹시 내가 전생에 이곳에서 수행자로 살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비야기리승원 터에는 수많은 유적이 흩어져 있다. 한때 번영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비야기리뿐만아니라 아누라다푸라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적을 보자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착각일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종종 해본다. 사람들은 겨울철에 따뜻한 남쪽나라로 한달살이, 두달살이 하러 떠나는데 스리랑카로 떠나는 것은 어떨지에 대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혜월스님하고도 했다.

 

혜월스님은 아누라다푸라가 고향이라고 한다. 지금 엘에이에 살고 있지만 일년에 두 번은 온다고 한다. 이번에 오는 기간에 맞추어 순례를 한 것이다. 그런데 스님은 아누라다푸라에 토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친척이 도와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스리랑카는 수행자가 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것 같다. 너무 산업화 되어 있지도 않고 너무 문명화 되어 있지 않다. 천년전이나 이천년전의 모습 그대로인 것 같다. 무엇보다 기후조건이 좋다.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에서 한달살이 하고 싶다. 아니 스리랑카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2022-12-24

담마다사 이병욱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피를 선물받았는데  (0) 2022.12.28
알면 좋고 몰라도 그만인 것들  (0) 2022.12.27
동지날 팥죽과 동시성 현상  (0) 2022.12.23
강추위에 도보로 일터에  (0) 2022.12.23
스리랑카에도 불전함이  (0) 202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