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알면 좋고 몰라도 그만인 것들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2. 27. 08:55

알면 좋고 몰라도 그만인 것들



고요한 아침이다. 요즘은 밤이 길어 아침 7시가 가까이 되어도 캄캄하다. 더구나 영하의 날씨이다. 이런 날은 게을러지기 쉽다. 방안에서 꼼짝 않고 지내기 마련이다.

새벽이 되면, 막 잠에서 깨면 정신이 맑다.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 보석같은 생각이 샘솟는다. 이럴 때는 붙잡아 두어야 한다. 글로 남기는 것이 가장 좋다.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으로 기록을 남긴다.

오늘 아침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라고. 왜 그런가? 감각적 욕망은 현실의 괴로움을 잊게 하는 마취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는 행위도 이에 해당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을 즐기며 살아 간다. 눈과 귀 등으로 오감을 즐기는 것이 보통이다. 마음의 문을 단속하지 못하면 망상을 즐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감각은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다. 이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빠라맛타담마, 구경법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상에 법 아닌 것이 없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모두 법이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법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단지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산다면 법을 알 수 없다. 감각을 알아차렸을 때 그 때 법은 구경법이 된다. 고유한 특성과 함께 무상, 고, 무아라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는 구경법을 말한다.

날씨가 춥다. 추운 날씨에 밖에 나가면 추위를 실감한다. 매서운 추위가 얼굴을 때릴 때 "이것이 법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온몸으로 구경법을 접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선사가 제자를 깨쳐 주기 위해서 주장자로 머리통을 치는 것과 같다. 맞았을 때 그 아픔은 법이다. 아픔을 관찰했을 때 그 아픔은 구경법이 된다.


고요한 아침이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다. TV도 보지 않고 유튜브도 보지 않고 에스엔에스도 하지 않는다. 책도 읽지 않는다. 이 청정한 마음상태로 계속 있고 싶어 진다. 이럴 때 보석같은 생각이 떠오른다. 경전에서 봤던 문구도 떠오른다.

오늘 아침에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가르침이 떠올랐다. 감각적 욕망은 마취제와 같아서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머리맡에 있는 니까야를 읽다가 새겨 두었을 것이다.

아침에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 불쑥 떠올랐다. 물론 자극받았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에서 일어난 생각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어제 에스엔에스에서 본 것이 떠 올랐는데 그에 대한 반론을 생각하다가 니까야에서 읽은 구절이 떠오른 것이다.

니까야를 읽을 때는 밑줄 치며 읽는다. 주로 노랑 형광메모리펜을 활용한다. 중요하게 생각하면 분홍메모리펜 칠을 한다. 감각적 욕망은 모든 것을 덮는다는 가르침도 니까야 어디에 있을 것이다. 새겨두기 위해서 칠해 두었기 때문에 찾으면 될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어느 스님 글을 읽었다. 평소 글을 잘 쓰는 스님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경전에서 본 것을 현실의 삶에 적용했을 때 지혜가 생겨날 것이다. 스님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솔직하게 쓰기 때문에 설득력 있다. 그런 스님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 인사동에서 함께 차도 마셨다.

스님은 자신의 글에서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누군가 자신의 주장을 했을 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튜브를 보면 낚시성 제목이 많다. 제목만 봐도 재미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들어가 보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알면 좋은 것이고 몰라도 그만인 것이다. 시간 때우기로는 좋다. 그런데 이런 낚시성 제목을 접했을 때 드는 생각은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라는 의문이다.

언젠가 학교 동기들과 등산을 했었다. 그때 천주교 믿는 친구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걸으면서 불교에 대해서 몇가지 알려 주었다. 그 친구는 끝까지 잘 들어 주었다. 막판에 "그래서 어쩌라구?"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맥빠졌다.

사람들의 관심사가 모두 다르다. 자신의 관심사가 상대방에게도 먹힐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럴 때 딱 듣기 쉬운 말은 "그래서 어쩌라구요?"라는 말일 것이다.

스님은 말했다.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도 나의 번뇌를 줄일 수 있는 말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진리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지만 나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소리를 듣기 쉽다는 것이다.

요즘 뉴스를 보지 않는다. 아니 기피한다고 볼 수 있다. 선택적 뉴스에 놀아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뉴스를 보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왜 그런가? 나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탐, 진, 치를 소멸하는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뉴스는 물론 세상의 잡담에 대해서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라고 묻는다.

누구나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다. 그러나 강요할 수 없다. 강제로 답을 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관심사가 아닐 때는 무시당하기 쉽다. 그래서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라는 말을 듣기 쉽다.

부처님 가르침으로 산다. 머리맡에는 니까야가 있어서 수시로 열어 본다. 새길만한 구절이 있으면 칠해둔다. 언젠가 어느 때 불현듯 떠오를지 모른다. 경전에서 본 것이 현실의 삶에서 경험되었을 때 지혜가 된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경전을 보배처럼 여긴다.

니까야를 근거로 글을 쓴다. 니까야에 있는 아름다운 게송은 외운다. 니까야가 부처님의 원음이라는 사실에 의심하지 않는다. 읽어서 마음이 청정해졌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틀림 없다. 그럼에도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여 탐, 진, 치가 조금이라도 줄어 든다면 관심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으로 인하여 번뇌가 증가한다면 끊어야 할 것이다. 알면 좋고 몰라도 그만인 교수 논문 같은 것도 해당된다. 청정한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을 접했을 때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라고 반문한다.



2022-12-2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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