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스리랑카에도 불전함이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2. 22. 11:46

스리랑카에도 불전함이


스리랑카 순례를 다녀 왔다. 일생일대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이 될 것 같다. 교학의 나라이자 테라와다불교의 종가집이라 불리우는 스리랑카 순례는 오래 전부터 열열히 바라던 것이었다.

블로그를 시작하고 이삼년 지나지 않아 스리랑카 순례에 대한 글을 접했다. 악까까소(akkakaso)라는 외국 빅쿠가 자신의 사이트에 사진과 글을 남긴 것이다. 백장이 넘는 사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꽃공양’에 대한 것이었다.

악까까소 비구가 남긴 사진을 보면 불단에 꽃만 있었다. 이를 우리나라 불교와 비교하여 수많은 글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단에 육법공양이라 하여 쌀, 향, 초, 꽃 등을 올린다. 또 하나는 보시함에 대한 것이다.

악까까소 비구가 남긴 사진에서 보시함은 보이지 않았다. 불단에 오로지 꽃만 보였다. 이를 한국불교의 보시함과 비교하여 비판적인 글을 다수 올렸다. 그런데 이번 순례에서 직접확인 결과 보시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스리랑카 순례 마지막날에 켈라니야(Kelaniya) 사원에 갔다. 콜롬보를 대표하는 큰 사원이다. 더구나 일요일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그들은 대부분 흰 옷을 입었다. 그들의 신앙행위를 보면 진심이 우러나는 것 같다. 간절함 같은 것이 있다. 이를 기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도에는 이른바 사대기도가 있다. 건강, 학업, 사업, 치유의 기도를 말한다. 이런 기도를 할 때 그냥 하지 않는다. 공양물을 올려 놓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스리랑카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혜월스님에 따르면 기도하는 행위는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나 다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현실의 삶을 살아 가야 하는 재가불자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바라는 기도, 거래하는 기도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불자라면 서원을 세워야 한다. 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경전에서도 강조되는 사항이다.


“그렇다면 촌장이여, 거기에 대해 내가 그대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옳다고 생각한다면 대답해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촌장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성내는 마음을 가지고, 삿된 견해에 사로잡혔다면, 그에게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로 태어날지어다’ 라고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은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 까닭에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로 태어날 수 있습니까?” (S42.6)


악업을 무수히 지은 자가 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후손들이 천상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 했을 때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촌장이여,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커다란 큰 돌을 깊은 호수에 던져 넣었다고 합시다.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그것을 두고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라고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커다란 큰돌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합장하고 찬탄하고 순례한 까닭에 물 속에서 떠오르거나 땅위로 올라올 것입니까?” (S42.6) 라고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는 불자들은 경전에서의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바라는 기도, 거래하는 기도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대신 현실의 삶에서 공덕을 쌓는 행위를 한다. 이를 공덕행이라고 한다.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기도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을 믿는 불교에서는 무어라고 말할까? 이를 뿌자, 즉 공양이라고 말한다. 부처님 전에 공양한다면 불공이 될 것이다. 불자들은 신과 거래를 뜻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공덕을 쌓는 불공(佛供)을 드리는 것이다.


스리랑카 마지막 순례날에 켈라니야 사원에 갔었다. 흰 옷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불공드리는 모습이 매우 경건해 보였다. 이런 모습에 대해서 어떤 이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식으로 말하면 붓다뿌자, 즉 불공인 것이다.

불공드리는 불단이 있다. 대개 꽃이 놓여 있다. 이런 현상은 스리랑카 어느 사원에 가나 모두 다 똑같다. 악까까소 비구 사진 그대로인 것이다. 그런데 꽃공양 불단 한켠에는 도네이션(Donation)이라 하여 보시함도 있었던 것이다!


보시함을 보자 약간 혼란이 왔다. 스리랑카는 꽃공양만 있고 보시함은 없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양대 옆에는 별도의 보시함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켈라니야 사원에 관한 글을 올렸다. 장문의 글이다. 사원을 방문하고 다음날 호텔에서 새벽에 쓴 것이다. 새벽 2시부터 쓰기 시작하여 아침 6시까지 썼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쓰고자 했다. 보시함 이야기도 썼다.

보시함 이야기는 길지 않다. 이는 “꽃이 없으면 따로 마련된 보시함에 지폐를 넣는다.”라는 단 한줄에 지나지 않는다. 이 한줄에 무척 실망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분은 “스리랑카 사찰에 언제부터 불전함이 놓였으며 모든 사찰에 다 놓여 있는지..”라며 혜월스님에게 물어 보아 달라고 했다. 이런 댓글을 받고 참으로 난감했다. 공항으로 가는 날이기 때문에 스님에게 물어 볼 수는 없었다.

스리랑카 사원에는 불전함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곳곳에 도네이션 박스가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당황했다. 이러던 차에 개탄하는 듯한 댓글을 받았다. 내가 크게 잘못한 것 같았다. 내가 미안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답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도네이션 박스를 보았다. 큰 돈이 아니다.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 10루피나 20루피 짜리가 많다. 우리나라 돈으로 20원이나 40원에 해당된다. 꽃공양하기 위해서 수련 다섯 송이를 사면 200루피이다. 이렇게 본다면 꽃공양하는 데 돈이 훨씬 더 많이 들어간다. 단순 비교하면 열 배 이상이다.


사원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꽃공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모두 꽃을 들고 온다면 사원은 온통 꽃으로 덮여 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꽃을 살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다. 꽃 살 돈도 없는 사람들은 불공도 드릴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형편대로 공양하는 것이다. 가진 것만큼 공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돈이지만 도네이션박스에 넣는 것으로 본다.


조금이면 조금을 보시하라.
중간 정도면 중간 정도를 보시하라.
많으면 많이 보시하라.
보시할 것이 없으면 보시하지 말라.”(Jat.535)


자타카에 있는 보시에 대한 게송이다.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이다. 소유한 것이 많으면 많이 보시하면 된다. 가진 것이 별로 없으면 조금 하면 된다. 놀랍게도 보시할 것이 없으면 보시하지 말라고 했다.

어떤 보시를 하든지 공덕이 된다. 보시를 많이 한다고 하여 공덕이 더 많은 것은 아니다.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가 오히려 보시공덕이 더 많을 수 있다. 가진 것이 없으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이라도 보시하면 된다.


스리랑카에서 불공드릴 때 꽃공양이 일반화 되어 있다. 불단에는 온통 갖가지 꽃으로 장엄되어 있다. 그러나 꽃을 살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꽃공양불단 한켠에 작은 도네이션박스가 있다. 대개 10루피나 20루피 정도 되는 적은 금액이다. 이런 돈 마저 없으면 맨손으로 합장만 하면 된다.

불전함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해외성지순례를 다녀 보면 어느나라이든지 도네이션박스가 있다. 스리랑카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큰 돈 넣는 것은 아니다. 꽃도 사지 못하는 사람이나 꽃을 사지 못한 사람이 넣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갖추어져 있는 것 같다.

불자들은 절에 가면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 특히 불전에 섰을 때 공양을 하기 마련이다. 우라나라의 경우 대개 돈으로 한다. 아마도 불공 드리는데 있어서 최소한의 예의라고 보여진다. 이렇게 본다면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불전함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례법회를 갔었다. 그때는 신심으로 보시했다. 법당에 가서 삼배를 하기 전에 불전함에 먼저 넣는 것이다. 그때는 보시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많이 넣으면 좋은 줄 알았다. 넣다 보니 시퍼런 지폐를 넣었다. 한번 넣을 때마다 만원씩 넣었던 것이다.

어느 날 순례 갔었을 때 옆 사람이 불전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았다. 놀랍게도 천원을 넣었다. 만원도 아니고 오천원도 아닌 천원을 넣은 것이다. 이를 보고 보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대부분 천원을 넣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법당 저 법당에 넣다 보면 만원이 될지도 모르겠다.

재가불교운동을 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전함에 넣는 돈은 사찰돈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주지스님 개인용돈이라는 말도 들렸다. 이는 보시금이 투명하게 관리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후 권력승들이 차지하고 있는 사찰에 가면 보시함에 넣지 않았다.

보시함에 넣는 돈은 큰 돈이 아니다. 천원짜리가 대부분으로 푼돈이나 다름 없다. 진짜 큰 보시는 따로 있다. 대보시자는 보시함에 넣지 않고 직접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여기 스님은 모두 밍크코트 입은 사람만 상대 하는데 난 능력이 없고 보시도 못하니 조용히 법당에 앉았다 그냥 가요.”라는 말이 있다.

대시주자는 스님을 직접 만난다. 보시함에 넣는 사람들은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려야 하는데 빈손으로 올릴 수 없을 것이다. 초를 사도 5천원이고, 쌀을 한 주머니 사도 5천원 또는 만원이다. 등을 달면 수만원 될 것이다. 불사에 참여한다면 수십만원, 수백만원 들어 갈 것이다. 그래서 보시함에 천원이라도 넣는 것이다. 스리랑카에 있는 도네이션박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

스리랑카 사원에서 도네이션 박스를 본 것은 실망이었다. 스리랑카야말로 꽃공양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스리랑카에도 한켠에 보시함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글을 올렸을 때 어떤 이는 대단히 실망했다. 그저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죄송합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원에 보시함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왜 그런가? 재가불자는 윤회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윤회하는 삶에서 공덕을 짓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블로그에 올린 글이 있다. 이는 스리랑카 아상가 교수가 BTN에서 강연한 것을 녹취하여 글로 남긴 것이다. 이는 “부처나 아라한은 왜 공덕을 짓지 않을까, 아상가교수의 ‘업과 재생(rebirth)’강의를 듣고”(https://bolee591.tistory.com/16154753 ,2010-10-11)라는 제목의 글이다.

글을 보니 지금으로부터 12년전에 작성된 글이다. 지금 읽어 보아도 새롭다. 그것은 아상가교수의 강연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아상가 교수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선행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꾸살라 (kusala)행과 뿐냐(puñña)행을 말한다. 이를 선행과 공덕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꾸살라행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건전하고 지혜로운 것(wholesome, skillful)을 말한다. 그래서 ‘탐진치’로 행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는 해탈한 사람이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 해당된다. 출가자와 같은 출세간적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꾸살라행이 요청되는 것이다.

뿐냐행은 무엇인가? 뿐냐행은 공덕행(meritorious deeds)을 뜻한다. 이는 모종의 장기적 기대, 예를 들어 스님들께 공양대접하며 천상에 나기 바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약간의 선행을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뿐냐행, 즉 공덕행은 윤회하는 삶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현실적 삶을 사는 재가불자에게 요청되는 덕목에 해당된다.

부처님은 모두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리도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출세간적 진리와 세간적 진리를 말한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117번경 ‘커다란 마흔의 경’에서도 확인 된다.

맛지마니까야 117번 경에 따르면 정견에 대한 두 가지 정의가 있다. 세간적 정견에 대해서는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이다.”(M117.8)라고 했다. 그리고 출세간적 정견에 대해서는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는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이다.” (M117.9)라고 했다.

경에서 출세간적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세간적 정견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업자성정견’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정견이 있다.

출가자는 출세간적 정견에 따라 출세간적 진리를 추구한다. 이는 다름 아닌 꾸살라행(선행)이다. 탐, 진, 치라는 번뇌를 소멸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삶이다. 그러나 재가불자는 세간적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탐, 진, 치라는 번뇌와 함께 윤회하는 삶을 살며 뿐냐행(공덕)을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출가자의 삶과 재가자의 삶은 다르다. 스리랑카 사원에서 본 보시함은 재가자의 윤회하는 삶속에서 공덕을 짓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스리랑카 불자들이 보리수나 불탑, 불상 앞에서 꽃공양을 하는 것은 공덕행이 될 수 있다. 이는 보시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보시함에 돈을 넣는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스리랑카에서만큼은 보시함이 없기를 바랬으나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많은 금액은 아니다. 고작 10루피, 20루피 되는 푼돈이다. 진짜 큰 보시는 스님을 만나야 할 것이다.

밍크코트 입은 불자가 스님과 차를 마시면서 하는 보시는 클 것이다. 그러나 일반 불자는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보시함에 적은 금액을 넣고 삼배하고 나온다. 그런데 큰 보시나 작은 보시나 능력껏 한다는 것이다. 비록 불전함에 넣는 금액이 적은 액수일지라도 능력껏 했다면 밍크코트 입은 불자가 보시한 것보다 더 공덕이 클 것이다.


스라랑카 사원에서 보시함을 발견한 것은 실망이다. 그런 한편 꽃을 살 돈도 없는 사람이 10루피나 20루피 넣고 보시했을 때 그 마음을 해아리고 싶다. 만약 보시함도 없다면 어떨까? 아마도 공덕지을 기회도 주지 않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스리랑카의 보시함은 재가불자가 윤회하는 삶속에서 공덕 짓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2022-12-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