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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권 담마의 거울 2016 I, 7년전에 쓴 글이 지금도 유요한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24. 14:19

81권 담마의 거울 2016 I, 7년전에 쓴 글이 지금도 유요한 것은

 

 

설 연휴 마지막날이다. 오늘 출근한 사람들도 있다. 가게는 여는 곳이 많다. 연휴라 하여 빨간 숫자에 모두 문을 닫는다면 손해일 것이다. 월급생활자들이야 때 되면 월급이 나와서 문제 없지만 손님을 기다리는 업종은 다르다. 손님이 있건 없건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항상 현재를 살고 있다. 이렇게 글 쓰는 것도 현재를 쓰는 것이다. 2016년에 글을 썼던 것에 대한 서문도 이렇게 현재 시점을 쓰고 있다. 물론 2016년에 쓴 글도 현재 시점에서 쓴 것이다. 시간 차이가 7년 나긴 하지만 나의 글은 언제나 현재를 지향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여러 가지 의무적으로 하는 것들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책 만드는 것이다. 과거에 써 놓았던 글을 엮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가장 힘든 것은 서문을 쓰는 것이다.

 

목차도 중요하다. 그러나 목차 만드는 것은 기계적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편집을 하고 목차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 서문이다. 서문은 창작영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틈 날 때마다 책을 만든다. 오늘 만들어야 할 책은 2016년에 쓴 담마에 대한 것이다. 이를 ‘81권 담마의 거울 2016 I’이라고 책의 제목을 달았다. 81번째 책으로 20161 2일부터 711일까지 6개월 동안 쓴 글이다. 목차는 29개이고 292페이지 분량이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육방예경과 사무량심

2. 공부가 안되면 그곳을 떠나라

3. 누가 깨달은 자인가?

4.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니까야에도 있었네!

5. 열반은 죽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6.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7. 이미 죽은 자와 죽지 않는 자

8.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는 현자들

9. 현장스님이 인왕반야경을 설할 때

10. 부처님은 그날 밤 무엇을 깨달았을까?

11. 나마루빠는 이름-형태인가 정신-물질인가?

12.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적 발생연기에 대하여

13. 업이 달리 익을 때, 업에 대한 위대한 분석

14. 고귀한 침묵

15. 이것뿐이라는데

16. 이 세상은 꿈속의 세상?

17. 성향이나 기질은 바뀔 수 있을까?

18. 법을 지키는 자 법이 보호한다

19. 어떻게 해야 마음의 장애를 제어할 수 있을까?

20. 머물것인가 벗어날 것인가

21. 깨달음 논쟁은 지속되어야

22. 가야 할 여정을 끝낸 자

23. 많이 아는 것 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알아야

24. 동종요법에 의한 깨달음

25. 긍정적 침묵과 부정적 침묵

26. 예경지송을 구입하고

27. 빠알리 경송 외우기

28. 임종직전 귀에다 대고

29. 자신의 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

81권 담마의 거울 2016 I_230115.pdf
2.29MB

 

편집작업을 하면서 과거에 써 놓은 것을 빠른 속도로 스캔해 보았다. 그때 당시에 생각했었던 것과 지금 생각한 것과는 크게 차이가 없다. 과거에 쓴 글에 오류는 없다. 10, 20, 30년 지나도 오류가 없는 글을 쓰고자 했다.

 

어떤 이는 부처님 깨달음에 대하여 의심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나이가 들수록 완성되어 갔다는 것이다. 심지어 부처님이 깨닫지 못한 것도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의심은 후대 새로운 불교를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기라성 같은 논사들이 있다. 어느 논사에 대해서는 제2의 석가라고 칭한다. 더구나 보살 칭호를 붙여 준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부처님이라는 말 대신 석가라고 말한다. 정말 그들 말대로 부처님은 덜 깨달았을까? 부처님의 깨달음은 미완성일까?

 

한국불자들은 경전을 잘 읽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초기경전을 말한다. 이런 경향은 스님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경전을 의심한다. 마치 해보지 않은 자가 해보지 않은 것을 의심하는 것 같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읽어 보면 눈이 밝아 지는 것 같다. 모르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만일 경전을 읽지 않았다면 모른 채로 살 것이다.

 

경전을 읽다 보면 부처님 그분에 대하여 알게 된다. 또한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잘 알게 된다. 그 결과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부처님의 깨달음이 미완성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초기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자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의심한다. 부처님을 자신의 친구 부르듯이 석가라고 한다. 마치 동네 김가또는 박가부르듯이 한다. 스님들도 이런 경향이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그 깨달음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아눗따라 삼마삼보디(anuttara sammāsambodhi)”(S56.11)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깨달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무상정등각이라고 한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런 깨달음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회의론자들은 경전을 보지 않는 자들이다. 경전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이런 회의론자들을 예상해서일까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사성제를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검증했다. 이를 삼전십이행상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이 완전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선언을 했다. 어떻게 선언했는가? 이는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S56.1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완전한 것일까? 깨달음이 완전한 것이라면 타인에게 알려 주었을 때 똑 같은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사성제를 설한 이유가 된다. 마침내 꼰당냐가 가르침을 이해 했을 때 대지가 진동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검증된 순간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깨달음 그것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처음 정각을 이루었을 때 깨달음의 내용은 열반에 든 그날 밤 깨달음과 다르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더 높은 단계로 깨달아 간 것이 아니다.

 

정각을 이룬 날 깨달음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깨달음이다. 그래서 완성된 깨달음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의심한다면 그는 불자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이 책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경전을 근거로 하여 가르침을 쓴 것이기 때문에 담마의 거울이라고 했다. 그런데 2016년에 쓴 것을 지금 읽어 보아도 고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진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리는 변함이 없다. 이런 이유로 7년전에 쓴 글은 지금도 유효하다. 앞으로 10, 20, 30년 후에도 유효할 것이다.

 

 

2023-01-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