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의 진검승부에서
진검승부가 있다. 진짜 칼로 싸우는 것이다.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다. 둘 중에 하나는 죽는다. 실력이 어슷비슷하면 꽤 오래 갈 것이다. 실력 차이가 난다면 단칼에 끝날 것이다.
진검승부하면 한사람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실력이 더 강한 자가 살아 남는다. 단 한번의 승부로 생사가 갈리기 때문에 고도로 집중을 요한다. 평소 훈련량에 따라 생사가 결정된다. 가르침의 진검승부는 없을까?
가르침에도 진검승부가 있다. 담마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대왕이여, 그들이 지혜가 있는지는 논의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논의해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알지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 없습니다.”(S3.11)
지혜
가 있는지는 논의해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토론을 통해서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한번만 토론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번 해 보아야 한다.
법거량이 있다. 선사들이 법에 대해서 진검승부하는 것이다. 질문을 해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지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 기발한 말이 나오기도 한다. 마치 동문서답식 문답을 말한다. 또는 할과 방, 또는 양구라고 말하는 침묵이 동원되기도 한다.
선사들의 진검승부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지 점검받기 위한 것도 있다. 또한 자신의 깨달음이 맞는 것인지 확인 받기 위한 것도 있다. 그래서 호기롭게 큰스님 앞에서 질문을 던진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본다. 범부들은 깨달은 자의 마음을 모른다. 그러나 깨달은 자는 범부의 마음을 안다. 그런데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위자는 상위자의 마음을 모른다. 수다원은 사다함의 마음을 모르는 것과 같다. 이런 논리라면 아라한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알 것이다.
법담을 하면 지혜가 높은 자가 주도하게 되어 있다.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심오한 얘기를 했을 때 경청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혜가 상대방보다 더 뛰어날 때 이기는 것과 같다.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과 외도 사문과의 대론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에서 자이나교도 삿짜까와의 대론(M35)이 잘 알려져 있다.
삿짜까는 토론의 달인이었다. 삿짜까가 공개토론 했을 때 기둥도 감동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과 자아를 주제로 한 대론에서 패했다.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에 패한 것이다. 부처님은 문답을 통한 논리적 설명으로 자이나교의 자아론을 논파했다.
대론은 진검승부하는 것과 같다. 평소 닦은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때 실력은 지식이 아니다. 책을 열어 보아야만 알 수 있고 검색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끄집어 내야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지혜이다. 지혜는 항상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
지식도 지혜가 될 수 있다. 책 읽은 것이나 들은 것을 새기고 있다면 지혜가 된다. 이런 지혜를 사띠라고 말할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은 필기구가 없었다. 부처님이 설법할 때 귀담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고자 했을 것이다. 조용한 때 마음을 집중하고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도 사띠에 해당될 것이다.
가르침이 기억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함께 들은 도반에게 물어 볼 것이다. 또 한편으로 도반과 함께 가르침에 대해서 토론할 것이다. 이른바 법담을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가르침을 새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침을 새기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사띠라 하여 반드시 마음챙김만을 말하지 않는다. 사띠라 하여 반드시 마음지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르침을 새기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새긴다는 것에는 기억과 지혜가 있는 것을 말한다. 가르침을 체화하면 지혜가 된다.
사띠는 기억과 지혜가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띠는 계발될 수 있다. 가르침을 기억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면 지혜가 계발된 것이다. 이처럼 기억과 지혜가 플러스 된 것이 새김이다.
삶의 과정에서 매일매일 진검승부하고 있다. 지혜의 진검승부를 말한다. 그런데 지혜의 진검승부에서 지식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론은 지혜의 진검승부나 다름없다. 대론할 때 책을 볼 수 없다. 또한 검색 할수도 없다. 오로지 자신의 머리에 의지해야 한다. 부처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억한 것이나 새긴 것을 활용해야 한다.
종종 학자들이 세미나 하는 것을 본다. 어떤 학자는 준비된 원고를 줄줄 읽는다. 어떤 학자는 파워포인트로 정리한 것을 설명한다. 어떤 학자는 원고없이 파워포인트없이 말로서 설명한다. 누가 가장 지혜로운 자인가? 원고없이 말로 하는 사람이다. 머리 속에 있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자이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려면 대화해 보면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깨달았는지 알려면 대론해 보면 알 수 있다. 지혜의 진검승부, 깨달음의 진검승부를 하는 것이다.
검을 잡고 겨룰 때 다른 것에 의지할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의 실력에 생사가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지혜로 진검승부 할 때 수행의 결과에 달려 있다. 생사의 진검승부에서는 평소 닦은 기량에서 결정난다.
나는 매일 죽는 사람이다. 경계에 부딪칠 때 마다 무참히 깨진다. 악마와의 진검승부에서 진 것이다. 지혜가 확립되어 있지 않아서 퇴전하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오염원이라는 악마의 군대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전쟁에서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자야말로
참으로 전쟁의 승리자이다.”(Dhp.103)
2023-02-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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