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사냥은 성공할까?
이래도 되는 것일까?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세상이다. 그들의 기획 사정에 걸려들면 망한다. 조국 케이스가 대표적이다. 이번에는 이재명 사냥에 나섰다.
오늘 체포동의안은 어떻게 될까? 부결되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사냥을 멈출까?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한번 감옥 보내기로 마음 먹었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고서라도 실행하고 말 것이다. 정경심을 감옥 보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흔히 불교계에서 하는 말이 있다. 인과의 엄중함을 알라는 것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의 두려움을 안다면 악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인과를 믿지 않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 같다. 지금 이대로가 좋은 사람들은 지금 이대로 천년만년 살고자 하는 것 같다. 설령 죽더라고 죽으면 끝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저 세상은 있을까? 인과의 엄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은 저 세상이 있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 돌아와 알려 준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글쓰기는 어쩌면 단멸론자들과 투쟁인지 모른다. 스님이건 재가불자이건 단멸론자들이 너무 많다. 죽으면 끝난다는 것이다. 당연히 저 세상은 없다. 이것은 또한 윤회의 부정이다. 많이 배웠다는 학자들 또한 윤회를 부정한다.
어떤 이는 “설마 스님이 윤회를 부정할까?”라며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도 윤회를 부정한다. 유튜브에서 키워드 검색하면 확인할 수 있다.
불교학자도 윤회를 부정할까? 부정하는 사람을 보았다. 직접 들은 것이다. 그의 논문에서도 부정적 언사가 있다. 타종교인이면서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도 있다. 그들은 불교를 단지 철학정도로 여긴다. 윤회에 대해서 관심 없는 것은 당연하다.
육사외도 스승 중에 아지따 께싸깜발린이 있다. 그는 유물론자이다. 오로지 물질을 말한다. 정신도 물질에서 나왔기 때문에 몸이 파괴되어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헌공도 없고,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화생하는 뭇삶도 없다.”(S24.5)라고 했다.
오늘날 아지따 께싸깜발린의 후예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과학적 유물론자들이 대표적이다. 물질을 탐구하는 과학에 근거한 유물론을 말한다. 당연히 저 세상도 없고 윤회도 없다. 당연히 정신은 몸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죽으면 정신도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본다.
과학적 유물론에 근거하여 법문하는 스님이 있다. 스님은 즉문즉설에서 과학적 탐구를 강조한다. 당연히 윤회는 부정된다. 윤회를 인정하면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이 보고, 윤회를 부정하면 지동설을 인정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런 사람이 있다. “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면 믿을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놀랍게도 디가니까야 ‘빠야시의 경’(D23)을 보면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빠야시 왕자는 “저 세상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없고, 선행이나 악행도 없고, 업의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D23.1)라는 견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자에게 왜 단멸론적 견해가 생겨났을까? 그것은 죽어서 이 세상에 돌아와서 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경에서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D23.1)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지옥과 천상은 있을까? 저 세상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당연히 있다고 말할 것이다. 저 세상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지옥이 어디 있고 천상이 어디 있어? 죽으면 끝이지 뭐.”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지옥에 간 사람이나 천상에 간 사람이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중상모략하는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합법적인 중상모략도 있다.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선택적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주로 정적을 제거할 때 사용된다. 이런 행위가 판사와 연계된다면 연성쿠데타로 정권을 잡을 수 있다. 브라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3월 대선에서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지금은 이재명 사냥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중상모략이라 해야 할 것이다.
중상모략은 십악행 중에 하나로 들어간다. 살생, 도둑질, 간음 등 십악행을 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옥에 떨어진 자가 지옥에서 이 세상으로 돌아와서 지옥의 현실을 알려 준 사람은 업었다. 이런 이유로 지옥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 마음 놓고 악행을 저질러도 다음 생이 없다면, 저 세상이 없다면, 윤회가 없다면 중상모략을 해도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인과의 엄중함을 모르는 것이다.
지옥에 떨어진 자들은 왜 이 세상에 오지 않는 것일까? 경에서는 ‘흉악한 도둑의 비유’(D23.8)를 들었다. 중죄를 저지를 사람이 있는데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사형이 집행 되기 전에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서 며칠간 여행을 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과연 이런 사형수의 요청을 들어 줄까? 아마 도망갈 것임을 알기 때문에 거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에 떨어진 자는 어떠할까?
중상모략 등 십악행을 저지른 자가 있다. 그는 악행의 과보를 받아 지옥에 떨어졌다. 그는 죽기 전에 말한 것이 있다. 지옥에 가게 되면 꼭 이 세상으로 되돌아와서 지옥이 있는 것을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지옥에 떨어진 자는 약속을 지키고자 했다. 지옥지기들에게 이와 같은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인간 세상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과연 이런 약속을 들어 줄 수 있을까?
저 세상이 있지만 돌아 오지 못한 이유는 많다. 십선행을 하여 천상에 태어난 자도 돌아 오지 않았다. 왜 돌아 오지 않았을까? 경에서는 ‘똥구덩이의 비유’(D23.10)를 들었다. 이 세상은 천상에 비하면 악취나는 똥통같다는 것이다. 천상에 태어난 자가 똥구덩이와 같은 인간 세상에 돌아와서 천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없음을 말한다. 이런 비유로 부족하다면 ‘삼십삼천의 비유’(D23.12)를 들어야 한다.
욕계천상 삼십삼천의 수명은 매우 길다. 경에 따르면 삼십삼천에서 하루는 인간의 백년에 해당된다고 한다. 만일 죽은 자가 천상에 태어나서 이삼일만 보내도 인간세상은 이삼백년이 된다. 설령 돌아와도 자신과 약속했던 사람은 살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천상에 태어난 자가 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이 세상으로 와도 전달할 수 없음을 말한다.
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일반사람은 물론 재가불자, 스님, 학자들도 믿지 않는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 근본적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육안으로 저 세상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육안이 있다면 천안도 있다. 저 세상은 천안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천안을 계발해야 한다. 선정수행을 하여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이 세상도 보고 저 세상도 보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봅니다.”(D23.13)라는 부처님 제자의 말로 알 수 있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인과의 엄중함을 모른다. 죽으면 끝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저 세상을 부정하고 윤회를 부정한다. 정말 그들의 소망대로 저 세상이 없다면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저 세상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지옥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이재명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분명한 사실은 이재명을 중상모략하여 악마화 하면 할수록 이재명은 김대중급이 된다는 사실이다. 경전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어떤 추악하고 왜소한 야차가 있었다. 그는 감히 신들의 제왕 제석천의 보좌에 앉았다. 마치 노숙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재벌 회장집 의자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이에 삼십삼천의 신들은 분노했다.
야차는 신들이 분노하면 할수록 용모가 아름다워져 갔다. 그리고 용모도 단정해져 갔다. 욕을 하면 할수록 점점 인품 있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S11.22)라고 했다.
오늘날 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를 볼 수 있다. 굥도 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였다고 볼 수 있다. 서초동에서 백만명이 모여 검찰개혁 구호를 외쳤을 때 대선후보급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검찰에서 이재명을 키워 주고 있다. 이재명을 악마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재명을 악마화 하면 할수록 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민주주의가 발달된 나라라고 한다. 국민들은 5년이 멀다하고 정권교체를 한다. 그렇다고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는다. 벌써 30년 이상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들에 의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검사나 판사와 같은 협잡꾼들에 의한 연성쿠데타가 일어났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국은 정의로운 사회일까? 결코 정의로운 사회라고 볼 수 없다. 정의롭지 않은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깡패가 주먹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 현재 이재명을 악마화하는 것이 절정이다.
이재명을 악마화 하면 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가 될 것이다. 저쪽 편에서 분노를 하고 욕을 하면 할수록 아름다워지고 용모가 단정해지는 것이다. 결국 이재명을 김대중급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이번에 되지 않는다면 다음에라도 된다. 언젠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단멸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저 세상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악행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권력이 있다고 해서 권력을 남용했을 때 악의 씨앗을 심어 놓는 것과 같다. 어느 시기에 가면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 그때 까지는 희희낙낙하며 사는 것이다.
“악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악한 자도 행운을 누린다.
악의 열매가 익으면,
그때 악인은 죄악을 받는다.”(Dhp.119)
2023-02-2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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