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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을 참교육 시키기위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14. 08:56

지식인들을 참교육 시키기위하여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어떤 이는 날씨이야기부터 한다. 오늘 날씨 상황을 알려주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럴 때 날씨와 독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무래도 어제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어제는 격정의 하루를 보냈다. 글을 써 놓고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분노의 마음을 쓰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갑자기 ‘참교육’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참교육이란 무엇일까? 나이 든 세대라면 전교조의 참교육을 떠올릴 것이다. 1980년대 말 전교조가 결성되었을 때 참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요즘 참교육이라는 말은 전교조의 구호와 전혀 다른 용어가 되었다.
 
참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작년 정평법회 때 들었다. 작년 상반기 줌으로 진행된 법회에서 30대의 젊은 여성 활동가가 참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계몽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각성에 대한 것이었다.
 
참교육이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전교조의 전매특허와 같은 말은 아니다. 누구나 참교육이라는 말을 할 수 있고 또한 참교육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개념의 참교육이 나온 것은 2010년대 이후부터라고 한다.
 
새로운 개념의 참교육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계몽과 각성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잘못을 잘못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똑 같은 행위를 해서 그 행위가 잘못된 것을 알려 주는 것도 해당된다.
 
여기 버스 속에서 소란을 피우는 아이가 있다. 이를 어머니가 가만 내버려 둔다면 어떻게 될까? 승객들은 불편해 할 것이다. 이럴 때 어떤 젊은이가 갑자기 큰 소리로 통화를 한다. 승객들도 불편해 하고 아이의 어머니도 불편해 할 것이다. 이때 어머니는 눈치를 챌 것이다. 그제서야 아이를 달래서 조용하게 할 것이다. 이럴 때 젊은이는 아이 어머니에게 ‘참교육 했다’라고 말한다.
 
세월에 따라 용어의 의미도 변한다. 참교육이 대표적이다. 소란을 피워서 무안을 주는 것도 참교육의 한방편인 것이다. 이럴 때 참교육은 부정적인 요소를 가진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단죄’의 기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 참교육이라는 말은 계몽하고 각성을 하게 하는 의미가 더 큰 것이다. 어제 쓴 글도 어쩌면 참교육에 대한 것인지 모른다.
 
글을 쓰는 행위는 어떻게 해서든지 구업(口業)을 짓게 되어 있다. 구업 짓지 않으려면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가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정의롭지 않게 보였기 때문이다.
 
정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의롭다고 말한다. 특히 좌파지식인들이 그런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의 논리를 보면 양비론적이라는 것이다.
 
식자우환이라고 한다. 많이 아는 것이 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면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지식인들이 비판적으로 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대체로 나약하고 비겁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말만 있고 실천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양비론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양비론자가 되는 것일까?
 
지식인들은 아는 것이 많다. 아는 것이 많으면 비판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것이든지 무엇이든지 비판적 시각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여도 비판하고 야도 비판한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그룹은 비판하지 않는다.
 
비판은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전가의 보도와 같다. 비판의 칼은 누구에게나 겨눌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속한 그룹에는 예외라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아주 왼쪽에 치우친 이념을 가진 자라면 다른 스펙트럼에 포착되는 대상은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된다.
 
나는 진보주의자인가 보수주의자인가? 뚜렷하지가 않다.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보수적으로 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에게 이념적 스펙트럼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정의’에 대한 것이다. 정의로운 삶을 이념보다 더 중요시하게 여긴다.
 
진보나 보수라는 말은 이념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이념이든지 폭력성을 띠게 되어 있다. 자신의 이념과 맞지 않으면 적대시하고 배제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아주 오른쪽에 치우친 사람들은 다른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적대시한다. 아주 왼쪽에 치우친 사람들 역시 다른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적대시한다. 이렇게 본다면 극우와 극좌는 통하는 것이 있다.
 
극우와 극좌는 극단이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극단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극우와 극좌에 속한 자들은 이념 투쟁을 하는데 자신이 속한 스펙트럼이 아니면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런 면에 있어서 극우와 극좌는 상통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념적 스펙트럼이 희박하다. 나 역시 이념적 스펙트럼이 희박하다. 다만 정의로 판단한다. 그 사람이 정의로운지 아닌지로 판단하는 것이다. 정치세력이라면 정의로운 집단인지 아닌지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의 표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겪는 일이 정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어떤 것이 있을까? 요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법조인들은 정의로울까? 어렸을 때는 정의로운 사람들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환상은 깨졌다. 그것도 최근 십년 안에 깨진 것이다. 조국사태 때 극명하게 알게 되었다.
 
조국사태 때 서초동에 있었다. 그리고 여의도에도 있었다. 그것은 정의롭지 않은 자들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나 그때 가장 왼쪽에 치우쳐 있던 지식인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때도 여전히 양비론자들이었다.
 
이번에 야당대표가 사냥감이 되고 있다. 사냥은 사냥이 끝나야 끝나는 것이다. 사냥을 하는 자들은 정의로운 자들일까? 정의와는 전혀 먼 자들이다. 단지 권력의지만 작동해서 앞으로만 가는 사냥개와 같은 자들이다.
 
아주 왼쪽에 치우친 지식인들이 있다. 그들은 사냥에 대상이 되는 야당대표를 비판한다. 대승적 결단을 하라는 것이다. 사냥을 하는 자들의 논리와 같은 것이다. 그들 지식인들은 비판이라는 칼로 양쪽을 친다. 이른바 양비론이다. 이런 지식인들을 정의로운 자들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정의는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현실에 있다. 정의롭지 않은 현상을 보고서 분노하면 정의인 것이다. 가장 좋은 예가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다.
 
몇 년전 다큐영화 ‘김군’을 보았다. 영화에서 증언자들이 말한 것이 있다. 총을 든 것에 대하여 증언한 것이다. 눈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눈이 뒤집히더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의롭지 않은 행위에 항거하는 것이 곧 정의인 것이다.
 
광주시민들에게 처음부터 역사의식이나 정의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옆에서 죽어 나갈 때 가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유없이 당한 것에 대한 반발심리인지 모른다.
 
지금 상황은 1980년 광주에서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정의롭지 않은 세력들이 정의롭지 않은 행위를 하고 있을 때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정의로운 행위가 된다. 촛불대행진에 참여하는 것도 정의로운 행위가 된다. 야당대표의 사냥에 분노하는 것도 정의로운 행위가 된다.
 
불의의 항거하는 것은 정의로운 행위이다. 그럼에도 지식인들은 비판적이다. 지식인은 비판이 있어야 존재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신들의 이념을 위하여 다른 스펙트럼을 비판한다면 양비론자가 될 것이고 이기적이 될 것이다. 이런 행위는 정의롭지 않다.
 
지식인들이 양비론자가 되고 양시론자가 되는 것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에 대한 것이 크다. 어느 교수는 지난해 대선 때 누가 되든 상관없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기 때문에 누가 되든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명예교수라는 자신의 지위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고액의 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지식인들은 비판을 무기로 삼는다. 그러나 지식인이 자신의 이익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비판한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어제 아주 왼쪽에 치우친 지식인들의 정의롭지 않은 행위에 대하여 비판하기 위하여, 그리고 참교육 하기 위해서 글을 썼다. 오늘은 이렇게 보충 글을 쓰고 있다. 그런 나는 정의로운가?
 
정의롭게 살고자 한다. 어떻게 해야 정의롭게 사는 것일까? 그것은 불의에 항거하는 것이다. 촛불대행진에 나가는 것도 불의에 항거하는 것이다. 야당대표의 사냥에 분노하는 것도 정의로운 행위이다. 정의는 다른데 있지 않다. 대다수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광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광화문촛불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초동촛불에서 그랬던 것처럼.
 
 
2023-03-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