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사랑스런 눈빛으로 응시하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3. 4. 9. 08:54

사랑스런 눈빛으로 응시하면

 

 


눈으로 말할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눈으로 말할 수 있다. 사랑하는 것도 눈으로 말할 수 있고 경멸하는 것도 눈으로 말할 수 있다.

여기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커플은 끊임없이 떠들어 댄다.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다. 어떤 커플은 조용하다. 눈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눈빛으로 말하는 것이다. 전자는 불륜의 관계이기 쉽고 후자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부이기 쉽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서 "당신을 사랑해!"라고 해야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사랑에는 말이 필요 없을 때가 있다. 사랑스러운 눈빛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의 언어이다.

초기경전에도 눈으로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그들은 친절하여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처럼 융화하며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지냅니다." (A3.93)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승가에서 수행승들끼리 지내는 삶의 방식이다.

승가에서는 꼭 필요한 말만 한다. 도움이 필요하면 손짓으로 한다. 그렇다고 벙어리처럼 지내는 것은 아니다. 담마(법)에 대해서는 밤을 세워 토론하기 때문이다. 소통할 때 언어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스런 눈빛 하나로 충분할 때가 있다. 특히 부부간에 그렇다.

부부간에 대화를 많이 하라고 한다. 빈말이라도 "사랑해"라는 말을 하라고 한다.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타령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한계가 있다. 마치 진리를 언어로 설명하려 하는 것과 같다. 이럴 때는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몸으로 말하는 것이다. 사랑스런 눈빛으로 진실한 마음을 전할 수 있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카레니나 강연을 들었다  소설을 읽어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공감했다. 강연에서 전하고자 했던 것은 '사랑스런 눈빛으로 대화하기'이었기 때문이다.

강연에 따르면, 성장하지 않는 커플과 성장하는 커플의 차이는 대화에서도 발견된다고 했다. 안나와 브론스키 커플은 대화를 많이 한다. 소설속에서는 끊임 없이 말을 많이 하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끊임 없이 말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다.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말이 많을수록 진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안나와 브론스키 커플은 불륜관계였다. 그렇다면 진정한 소통방식은 어떤 것일까?

톨스토이 작품속에서 진정한 대화와 진정한 소통은 어떤 방식일까? 가능하면 말을 자제하는 것이다. 말을 거의 안하는 커플이 해당된다. 말을 많이 하려는 것보다 잘 듣거나 잘 보기를 잘 하는 사람들이다. 대개 상대방을 사랑스런 눈빛으로 응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톨스토이 문학에서 응시는 중요한 소통방식이라고 한다. 마치 “눈으로 말해요”라는 가사를 떠 올리게 한다. 또 부처님이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대하며” (Vin.I.351) 라는 구절을 떠 올리게 한다. 안나카레니나에 이런 구절이 있다.

“레빈은 키티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러자 그 눈빛을 통해 자기와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의 감정은 어느 틈에 그에게로 옮아 갔다. 그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밝고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결혼식장에서 레빈은 키티와 눈이 마주치면서 안심이 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 대화가 없어도 소통이 된 것이다.

어떤 커플은 사랑을 확인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나 사랑해?”라고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자는 “당신만을 사랑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랑을 확인하는 말에는 확답을 해주어야 한다.

사랑을 확인할 때마다 확답을 해주는 것은 피곤한 일이 될 것이다.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떠버릴 것이다. 그때마다 대꾸를 해주어야 한다. 그러다 침묵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 어색할 것이다. 이런 커플은 불륜관계에서 볼 수 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커플은 말이 필요 없을 수 있다. 사랑스런 눈빛으로도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레빈과 키티의 관계가 그렇다. 결혼식장에서 사랑스런 눈빛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랑스런 눈빛은 부부관계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도반들의 모임에서도 요청된다.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는 수행승들의 모임에서는 "그들은 친절하여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처럼 융화하며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지냅니다." (A3.93)라고 했다. 이것은 화합의 모임이다. 그래서 승가를 화합승, 즉 화합의 승가라고 한다.

부처님도 사랑스런 눈빛으로 말했다. 이는 부처님의 눈으로 알 수 있다. 디가니까야 '위대한 사람의 특징의 경'(D30)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곁눈으로 보지 않고 비스듬히 보지 않고
은밀하게 보지 않고
바로 보고 열린 마음으로 보고 정직하게 보고
사랑스런 눈빛으로 보면서 많은 사람을 보았다."(D30.29)

 


부처님 32상 중에서 '깊고 푸른 눈과 황소의 것과 같은 속눈썹의 특징'에 대한 것이다. 32상 중에서 29, 30번째에 해당된다.

경에서는 부처님의 눈과 눈썹을 황소의 그것으로 비유했다. 이는 경에서 "소의 것과 같은 속눈썹을 지니고 깊고 푸른 눈동자를 지녀 아름다웠다."(D30.30)라는 게송으로도 확인된다.

부처님의 눈은 소의 눈처럼 컸던 것 같다. 더구나 깊고 푸른 눈동자를 가졌다고 했다. 이런 눈에 대하여 나라시하가타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묘사되어 있다.

"잘 생긴 코는 길고 우뚝 솟았으며
형형한 눈동자는 어린 송아지처럼 푸르고
짙푸른 눈썹은 무지개 같으시니
바로 이분이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옵니다."(나라시하가타 5번 게송)

나라시하가타는 '인중사자게'라고 번역된다. 우리말로 '인간사자의 노래'이다. 32상을 가진 부처님의 신체적 덕성에 대하여 아홉 가지 게송으로 노래한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구전되어 온 게송이다.

게송에서 부처님 눈에 대하여 어린 송아지의 눈처럼 형형한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푸르고 깊은 눈동자를 가졌다고 했다.

누구든지 부처님의 눈동자와 마주치면 빠져 버릴 것이다. 왜 그런가? 사랑스런 눈빛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 당시 사람들은 부처님과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깨달았던 것 같다.

부처님 당시 사람들은 부처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는 법구경 인연담에서도 볼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부처님의 덕성 때문이다.

부처님의 신체적 덕성은 32상으로 대표된다. 누구든지 부처님의 신체적 덕성을 대했을 때 감화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깊고 푸른 눈으로 응시하며 담마를 설했을 때 빠져들지 않을 자 없었을 것이다. 굳이 부처님이 설법하지 않아도 부처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청정해졌을 것이다.

부처님은 깊고 푸른 눈을 가졌다. 이런 눈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거 전생에서부터 쌓은 공덕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곁눈으로 보지 않고 비스듬히 보지 않고 은밀하게 보지 않고
바로 보고 열린 마음으로 보고 정직하게 보고 사랑스런 눈빛으로 보면서 많은 사람을 보았다."(D30.29)라고 한 것이다.

어느 해인가 어떤 재가수행자를 만났다. 그 수행자는 눈이 크고 맑았다. 그 수행자는 맑고 커다란 눈으로 상대방을 응시하며 말했다. 눈을 바라보면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내가 청정해지는 것 같았다.

청정한 수행자와 대화하다 보면 청정해지는 것 같다. 눈을 서로 응시하며 대화 했을 때 진실한 대화가 되는 것 같다. 눈을 피하거나 비스듬히 보며 대화한다면 진실한 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진실한 대화에는 반드시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눈빛 만으로도 대화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스런 눈빛으로 족할 것이다. 중생에 대한 사랑 역시 자비의 눈빛으로 족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굳이 대화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스런 눈빛으로 응시하는 것도 대화인 것이다. 성장하는 커플이나 화합의 모임에서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눈빛으로 소통하였을 때 두 사람에게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전체로 퍼져 나간다. 마치 행복바이러스와도 같은 것이다.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한 자가 나타났을 때 주변에게 영향을 주는 것과 같다. 한 행복한 커플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그 시초는 사랑스런 눈빛으로 응시하는 것이다.

2023-04-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