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5.18 사적지 탐방버스에 탑승하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3. 5. 20. 07:19

5.18 사적지 탐방버스에 탑승하고자

 


죽은 놈만 불쌍한 것일까? 그렇다면 산 자는 어떠할까? 죽은 자를 불쌍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동수 열사에 대해서 이야기 들었다. 2007년 오피스 공유할 때였다. 사업을 막 시작 했을 때 비용을 최소화 하고자 했다. 그래서 석수동에 책상 하나만 주어지는 공간을 확보했다. 그때 K를 만났다. K는 김동수 열사 친구였다. 같은 학번 같은 학과였던 것이다.

K와는 업무로 인해 만났다. 내가 그에게 조립 일을 주었다. 불과 2-3일 걸리는 일이었다. 이후 친구처럼 지냈다. 그는 78학번이고 나는 79학번이다.

K는 안양에 산다. 가까이 살아서 그 후로도 종종 만났다. 만나면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1980년 광주에 대해서 많이 들었다.

K는 조선대 3학년 때 참상을 목격했다. 총을 든 시민군은 아니었지만 구호대로서 활약했다. 그로부터 김동수열사 이야기도 들었다.

김동수 열사 이야기는 2000년대 말에 알았다. 이학종 기자가 법보신문에 김동수열사와 관련된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그때 열사라기 보다는 보살이라고 했다.

김동수 열사를 다시 알게 된 것은 2019년의 일이다. 광주항쟁 39주년을 기념하여 대불련에서 전세버스를 출발 시켰기 때문이다. 대불련 출신은 아니지만 버스에 탑승했다.

2019년 이후 매년 김동수 열사 추모제에 참석하고 있다. 코로나가 극심했던 2021년 한해만 가지 못했다.

추모제에 가면 5.18묘역에 가게 된다. 작년에는 가지 못했다. 그럴경우 개인적으로 참배했다. 작년 함평 사촌모임 후 귀가길에 차를 돌려 참배했다.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지 43년이 되었다. 올해도 김동수 열사 추모제에 참석한다. 올해에는 대불련에서 전세버스가 출발하지 않는다. 그 대신 KTX로 간다.

행사는 조선대 서석홀에서 열린다. 2023년 5월 20일(토) 오전 11시부터 12시 반까지 2시간 반동안 진행된다. 이번 행사에 아내와 함께 하기로 했다. 아내는 아직까지 한번도 광주에 가 보지 못했다. 당연히 5.18묘역에도 가보지 못했다. 이번에 기회가 되서 가보기로 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광주를 잘 볼 수 있을까? 분명히 시티투어가 있을 것 같았다.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동구청에서 진행하는 5.18사적지 탐방이 있었던 것이다.

 


5.18사적지 탐방을 신청했다.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4시간 동안 진행된다. 토요일은 C코스로 도청-전일빌딩-5.18묘역-전남대-도청회귀 순으로 진행된다. 4시 50분에 고속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전남대 투어는 못할 것 같다.

사적지탐방에는 해설사가 있다. 또한 주먹밥과 음료수가 제공된다. 비용은 얼마일까? 놀랍게도 인당 7,000원이다. 왜 이렇게 저렴한 것일까? 관계자에 따르면 5.18을 널리 홍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5.18 주간에 매일 사적탐방이 시행된다.

5.18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마 그것은 동시대를 살았던 동질감 때문일 것이다. 비록 거기에 있지 않았지만 부채의식이 있다. 무엇보 내 또래의 스무살 안팍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김동수 열사는 스물세살에 죽었다. 사진을 보면 항상 그 나이 때 모습이다.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백발이 되었다. 김동수 열사 친구 K도 백발이 되었다.

언젠가 귀가 길에 K에게 물었다. 5.18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물은 것이다. 그는 "죽은 놈만 불쌍하지"라고 말했다. 그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물론 농담조로 또는 자조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럼에도 새겨 볼 만하다.

K는 구호대로 활약했다. 총 맞은 사람을 병원에 데려다 주는 일이라고 했다. 같은 과 친구와 함께 일했다고 한다. 마침내 최후 결단의 순간이 다가 왔다고 한다. 오늘밤 도청에 들어갈지 말지에 대한 결정의 순간을 말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세 명은 어느 허름한 가게에 모였다. 소주를 시켰다. 한잔씩 따라 자리에 놓았다. 그러나 아무도 마시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거의 한시간 말없이 있었다. 마침내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그 친구는 "내가 죽으면 우리 엄마가 너무 슬퍼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 말 한마디에 심경 변화가 일어 났다. 세 명은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김동수 열사는 그날 도청에 들어 갔다. 뻔히 죽을 줄 알고 들어간 것이다. 총은 들었지만 계엄군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부모생각도 났고 형제생각도 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들어갔다. 결사항전하기로 한 것이다.

흔히 5.18정신을 말한다. 5.18정신은 광주정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진정한 광주정신은 도청에서 결사항전함으로써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때 도청을 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5.18은 아마도 사태나 폭동으로 폄하되었을 것이다.

도청에서 결사항전이 있었다. 목숨을 걸고 저항했기에 오늘날 5.18이 있게 되었다. 그것은 4.19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 이상이었는지 모른다. 왜 그런가?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다. 훗날 사람들은 이를 보살정신이라고 말한다.

불교계에서는 김동수 열사라고 말하기 보다는 김동수 보살이라고 말한다. 도청에 죽으러 들어 갔기 때문이다. 도청에 들어간 것은 보살정신이 아니면 설명하기 힘들다. 이제 43년 되었다.

매년 5월이 오면 추모제에 참석한다. 그리고 글을 남긴다. 보살과 동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친구의 친구이다. 사회친구도 친구인 것이다. 그로부터 "죽은놈만 불쌍하지"라는 자조섞인 말을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가 박근혜 정권 때였다.

죽은 사람을 억울하지 않게 해야 한다. 죽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 보수측에서 정권 잡았을 때 얼마나 5.18을 폄하 했던가! 보수쪽에서 정권을 계속 잡는 다면 죽은 놈만 억울하게 될 수 있다.

역사는 달리 평가될 수 있다. 5.18을 폭동으로 보는 자들이 득세한다면 죽은 놈만 억울한 것이다. 5.18을 민중항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고귀한  죽음이 된다. 민주와 대동의 세상이 되었을 때 더이상 "죽은 놈만 불쌍하지"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2023-05-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