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물오리 가족에게서 생명의 경외를

담마다사 이병욱 2023. 5. 22. 06:41

물오리 가족에게서 생명의 경외를

 


어제 이른 아침 일터에 가는 길이었다. 일요임에도 일터에 간다. 일이 있어도 가고 일이 없어도 간다. 나이 들어 갈 곳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무엇보다 비용이다. 하루 드는 비용을 계산해 보면 놀릴 수 없다.


요즘 날씨가 좋아서 걸어 간다. 반드시 안양천을 건너야 한다. 건너서 메가트리아를 가로 지르고 굴다리를 지나면 된다. 그런데 안양천 징검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맞은 편에서 걸어온 여인이 있었다. 중년의 여인은 "저거 보세요"라고 말했다. 이런 경우는 드물다. 간혹 길을 묻는 경우는 있다. 대체 뭘 보라는 것일까? 놀랍게도 거기에는 물새가족이 있었던 것이다!

 


안양천과 학의천이 만나는 곳에 살고 있다. 이 곳을 쌍개울이라고 한다. 지리적으로 보면 안양의 중심지이다. 구도시와 신도시를 가르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또한 생태하천이기도 하다.

생태하천은 도시의 허파와도 같다. 연중 어느 때나 밤낮없이 운동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런 케이스는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런데 생태하천에서는 갖가지 생명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른 장딴지만한 물고기, 흰 색의 목이 긴 백로, 그리고 물오리를 볼 수 있다. 모두 야생에서 사는 것들이다.

도시에서 야생동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산이나 들에 가야 볼 수 있다는 관념을 깨는 것 같다. 도시에는 사람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도시에도 야생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새끼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든지 새끼들은 귀엽다. 갓 태어난 개새끼들이 구물거리는 것도 귀엽다. 또 한편으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다.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특히 두려운 것이다.

생명은 탄생과 죽음이 있다. 그 사이에 삶이 있다. 이를 한자어로 말하면 생, 노, 병, 사이다. 어떤 생명도 이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럴진대 생명에서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탄생은 축복이다. 생명체로 태어난 것은 축복받을 일이다. 아기가 탄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축생의 탄생은 어떠할까?

축생의 탄생도 축복이 될 수 있다. 일단 몸을 받아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축복이다. 그러나 탄생 이후 삶은 괴로움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경쟁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인간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금강경에 따르면 네 종류의 탄생이 있다. 이른바 태생, 난생, 습생, 화생를 말한다. 이와 같은 사생은 금강경이 시초가 아니다. 금강경보다 훨씬 오래 전에 성립된 니까야에서도 발견된다.

 


물오리는 난생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물오리는 언제 짝짓기 해서 언제 알을 낳아서 어느 곳에서 알을 부화시켰을까에 대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물오리 가족이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은 행복한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 같다. 보이는 생명체는 모두 젊고 건강하고 싱싱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겉에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도 인간이 있다. 저 반지하 골방에서도 사람들이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수많은 생명체가 있다. 내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에선가는 탄생이 있다. 그리고 삶이 있고 죽음이 있다.

 


이른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물새 가족을 보았다. 어미 물오리 하나에 여러마리 새끼가 물에서 노니는 것을 보았다. 보는 이에게는 한가로워 보인다. 그러나 물 아래 물갈퀴는 끊임없이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계속 먹거리를 찾을 것이다

생태하천에서 종종 생명체를 접한다. 팔뚝만한 잉어, 긴 목의 백로, 그리고 컬러풀한 청둥오리도 본다. 생태하천을 20여년 동안 다니면서 물오리 가족은 처음 봤다

 


물오리 가족에서 생명의 경외를 보았다. 생명은 놀랍고도 두려운 것이다. 한번 생겨나면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때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최후를 맞을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축하해야 한다. 그러나 두려운 마음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수행자는 생명을 두려운 마음으로 본다. 그것은 다름아닌 윤회의 두려움이다.

초기경전에서는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라고 했다. 이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 나의 행위가 모두 윤회의 원인이 됨을 말한다. 물오리 가족에게서 생명의 경외를 보았다. 그것은 상베가, 생노병사에 대한 지혜의 두려움인 것이다.

2023-05-22
담마다사 이병욱